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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바람벽

바뀌어진 지평선

뮤우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골맨의 신작품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의 생활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하다고 경멸하지 말아라
뮤우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우즈여

클락 게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매고 앉아있다
뮤우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노력
오늘은 나의 지평선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正視)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우즈여

투기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한 음모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奸惡)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우즈여

너의 복부(腹部)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골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오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아리아
―(영국인들은 호스피탈 에아리아?)
뮤우즈여

시인이 시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우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들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우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을 위하여

- 김수영, <바뀌어진 지평선>


::

대학 다닐 때, 이 시를 너무 좋아해서
일부를 발췌해서 학회 신입생 자료집에 실은 적도 있었다.
1950년대의 시라니, 믿어지질 않는다.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살아가는,
누구에게든 신경질을 부리고 싶어지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평온과 허무와 강박증과 호기심과 무기력이
조용히 설레발치는 날,
갑자기 읽고 싶어져서 찾아읽은 시.
이것 역시
오늘의 우울,
오늘의 경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