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밤도 밤이 아니다
술잔은 향기를 모으지 못하고
종소리는 퍼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
나무는 나무
바람은 영원히 바람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겨울은 뿌리째 겨울
꽃은 시들 새도 없이 말라죽고
아이들은 옷을 벗지 못한다
머리칼이 자라나고
초생달을 부풀게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처녀는 창가에 앉지 않고
태양은 솜이불을 말리지 못한다
석양이 문턱에 서성이고
베갯머리 노래를 못 잊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미인은 늙지 않으리
여름은 감탄도 없이 시들고
아카시아는 독을 뿜는다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년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사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 최영미, "사랑의 힘"
*
이 사람은, 시를 잘 쓴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아무튼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석달 열흘쯤 미쳐있어본 적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여자다.
데일 듯이 뜨거워본 적 있고
얼어붙을 듯 차가워본 적 있을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여자.
그래서
무심코 싫어하기는 어려운 여자.
그리고
몇 구절쯤은 입에 익어
술 몇 잔 들어가면군데군데는 읊어댈 수 있을
그 여자의 시 한 편.
10년 전에는, 이 여자의 이름 석자와 시집 제목을
스무살의 대학생들조차 익히 알고 있었는데
이제 더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 역시 시집을 마지막으로 산 게 언제였는지조차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