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한 정부고시가 강행됐다. 덕분에 저녁 무렵 다시 시내로 나갔다. 시청에 운집한 촛불시위의 군중들은 문자 그대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몇 시간을 또 도로 위에서 보냈다. 거리의 정치, 그 열광 속에 파묻혀 있는 일은 여전히 놀랍고 행복한 일이다. 하루가 더해질 때마다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구호가 어떻게 바뀌고 노래가 어떻게 바뀌며,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표정들이 또 어떻게 달리 모이고 흩어지는지를 목격하는 환희.
그 환희에 비하면, 고시 강행 자체야 예정되었던 일이니 놀라울 것도 없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일은 뜻밖에도 같은 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환경운동연합이 종로의 맥도날드 본사 앞에서 "고시철회, 협상무효"를 외치는 집회를 가졌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촛불시위에 대해 정부는 수백 명의 어린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연행하고 국민의 우려를 외면한 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위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고시를 추진하려고 하고 있"어 "국민의 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명박 정부에게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표하여 퍼포먼스를 기획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환경운동연합이 벌인 바로 이 퍼포먼스다.


"미친 소" 소리에 내내 불편하면서도 이제껏 반쯤은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었다. 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지인들에게 이야기하긴 했었다. 진보신당 중앙당에서 일하는 H에게도, 제발 "미친 소"라는 말을 구호에 넣지 말라고 얘기했었다. 소들이 미치다니. 병들어 참혹하게 죽어갔던 것은 인간 이전에 소였다. 풀을 뜯는 소에게 곡식을 먹이고 죽은 소를 사료로 만들어 먹임으로써 결국 이렇게 참혹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이고야 마는 이 가공할 자본주의, 인간과 동물이 먹고 살고 죽어가는 일들을 모두 산업으로 만들어버린 이 끔찍한 자본주의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서 이 나라 정부가 보인 작태는 참으로 가관이었고, 미국 정부와 축산업계의 후안무치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나는 기회 닿을 때마다 거리로 나가 촛불의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광우병'이라는 이 끔찍한 사태에 대해서라면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감는다. '미친소 반대'라는 구호는 문법적으로도 오류이지만, '미친 소'라는 말도 그것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거리낌 없이 쓰는 감수성도 나를 자꾸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쩌랴. '미친 소'라는 구호가 나올 때면 단지 침묵할 뿐.
그런데 이건 좀 심했다. 명색이 '환경운동연합' 아닌가. 사람들이 다 '미친 소'라는 구호를 외치더라도 "미친 소가 아닙니다, 병든 소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게 환경운동이다. 사람들이 모두 "협상무효, 고시철회"를 외칠 때, 인간이 초래한 끔찍한 재앙에 대하여 한번 더 환기시켜주어야 하는 게 환경운동이다. 그런데 저 거리낌 없는 '미친 소'의 구호며, 저 기가 막히는 그림이라니. 부시와 이명박을 등장시키는 것은 좋다. 그런데 저 해괴하고 망측한 소의 그림에 심지어 성조기라니. 소에게 국적이 있나. 국적을 가지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인간 만이 국경 밖의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다른 종과 다른 존재들을 파멸시킨다.
어제도 거리에서 마주친 H에게 말했다. '미친 소'라는 구호가 불편하다고. 그리고 그것이 문제라고 느끼지 않는 감수성이 불편하다고. 그는 이미 수 주 전 나에게 들은 그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보았지만, '미친 소'라는 구호가 가지는 임팩트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더라고 전했다. 그랬을 것이다. 왜 그렇게들 답하는지,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불편해하고 있을 뿐이다. 제발 영어로도 광우병이 'mad cow'라는, 공식 병명이 그렇게 때문에 '미친 소'라고 부르는 거라는 답만 안 나오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환경운동 단체가 저래서는 안 된다. 소의 존엄을 운운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댓가로 병 들어 참혹하게 죽는 소를 최소한 저렇게 그려서는 안 된다. 저 높은 광고탑에 저 많은 준비를 해서 올라가기까지, 환경운동연합의 그 어느 누구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놀랍다. 혹은 누군가 가졌던 문제의식이 결과적으로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놀랍고 놀랍다. 이 대목에서, 생태주의라는 말은 꺼내는 것조차 남새스럽다. 거창한 얘기도 아니다. "'병든 소'는 '병든 소'라고 부르자." 단지 이 말 한 마디를,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아야 하는 게 참으로 유감이다.
그 환희에 비하면, 고시 강행 자체야 예정되었던 일이니 놀라울 것도 없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일은 뜻밖에도 같은 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환경운동연합이 종로의 맥도날드 본사 앞에서 "고시철회, 협상무효"를 외치는 집회를 가졌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촛불시위에 대해 정부는 수백 명의 어린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연행하고 국민의 우려를 외면한 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위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고시를 추진하려고 하고 있"어 "국민의 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명박 정부에게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표하여 퍼포먼스를 기획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환경운동연합이 벌인 바로 이 퍼포먼스다.


"미친 소" 소리에 내내 불편하면서도 이제껏 반쯤은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었다. 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지인들에게 이야기하긴 했었다. 진보신당 중앙당에서 일하는 H에게도, 제발 "미친 소"라는 말을 구호에 넣지 말라고 얘기했었다. 소들이 미치다니. 병들어 참혹하게 죽어갔던 것은 인간 이전에 소였다. 풀을 뜯는 소에게 곡식을 먹이고 죽은 소를 사료로 만들어 먹임으로써 결국 이렇게 참혹한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벌이고야 마는 이 가공할 자본주의, 인간과 동물이 먹고 살고 죽어가는 일들을 모두 산업으로 만들어버린 이 끔찍한 자본주의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서 이 나라 정부가 보인 작태는 참으로 가관이었고, 미국 정부와 축산업계의 후안무치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나는 기회 닿을 때마다 거리로 나가 촛불의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광우병'이라는 이 끔찍한 사태에 대해서라면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감는다. '미친소 반대'라는 구호는 문법적으로도 오류이지만, '미친 소'라는 말도 그것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거리낌 없이 쓰는 감수성도 나를 자꾸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쩌랴. '미친 소'라는 구호가 나올 때면 단지 침묵할 뿐.
그런데 이건 좀 심했다. 명색이 '환경운동연합' 아닌가. 사람들이 다 '미친 소'라는 구호를 외치더라도 "미친 소가 아닙니다, 병든 소입니다"라고 말해야 하는 게 환경운동이다. 사람들이 모두 "협상무효, 고시철회"를 외칠 때, 인간이 초래한 끔찍한 재앙에 대하여 한번 더 환기시켜주어야 하는 게 환경운동이다. 그런데 저 거리낌 없는 '미친 소'의 구호며, 저 기가 막히는 그림이라니. 부시와 이명박을 등장시키는 것은 좋다. 그런데 저 해괴하고 망측한 소의 그림에 심지어 성조기라니. 소에게 국적이 있나. 국적을 가지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인간 만이 국경 밖의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다른 종과 다른 존재들을 파멸시킨다.
어제도 거리에서 마주친 H에게 말했다. '미친 소'라는 구호가 불편하다고. 그리고 그것이 문제라고 느끼지 않는 감수성이 불편하다고. 그는 이미 수 주 전 나에게 들은 그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보았지만, '미친 소'라는 구호가 가지는 임팩트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더라고 전했다. 그랬을 것이다. 왜 그렇게들 답하는지,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불편해하고 있을 뿐이다. 제발 영어로도 광우병이 'mad cow'라는, 공식 병명이 그렇게 때문에 '미친 소'라고 부르는 거라는 답만 안 나오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환경운동 단체가 저래서는 안 된다. 소의 존엄을 운운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댓가로 병 들어 참혹하게 죽는 소를 최소한 저렇게 그려서는 안 된다. 저 높은 광고탑에 저 많은 준비를 해서 올라가기까지, 환경운동연합의 그 어느 누구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놀랍다. 혹은 누군가 가졌던 문제의식이 결과적으로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놀랍고 놀랍다. 이 대목에서, 생태주의라는 말은 꺼내는 것조차 남새스럽다. 거창한 얘기도 아니다. "'병든 소'는 '병든 소'라고 부르자." 단지 이 말 한 마디를,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아야 하는 게 참으로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