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마을>은 인류학의 교본 같은 영화다. 마치 <M. 버터플라이>가 오리엔탈리즘의 교본이듯이. 그러므로 이 영화는 질적 방법론이나 인류학 개론수업의 첫 시간에 감상할 만한 영화이되, ‘좋은’ 인류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좀 삐딱한 태도로 보는 것이 필요한 텍스트일 것이다. 교본은 언제나 넘어서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대학을 졸업하고 갓 부임한 시골학교의 (여)교사. 그가 부임한 동족부락의 해괴한 남자. 그 남자의 존재를 둘러싼 마을의 미스터리. 그의 존재를 통해 점차 밝혀지는 마을주민들의 공모관계와 숨겨진 사실들. 미스터리를 풀고 그 마을을 떠나는 주인공.
압축하자면 이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이 영화의 플롯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단순하다. <안개마을>은 관객의 호흡을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끌어가는 영화가 아니며, 관객을 안일하게 만드는, 조금은 지루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부자연스러운 성우의 더빙이 영화를 압도하는 ‘옛날’ 영화여서가 아니다.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긴장의 힘이 약하고, 무엇보다 그 긴장이 너무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텍스트를 접하면 반드시 가장 먼저 구분해보도록 주입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조를 이 영화는 충실하게 답습한다. 애초에 평면적 전개를 피하기 위해 도입된 이 단계들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성실한 답습으로 인해 교본의 안일함을 낳는다.
현장에 처음 발을 내딛는 인류학자[발단]. 그가 발견하게 되는 특정한 사실들[전개]. 그것을 둘러싸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들[위기]. 관찰/면접/참여관찰을 통해 해명되는 현지인의 맥락과 인류학적 발견[절정]. 현장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획득한 후 현장을 떠나는 인류학자[결말].
이 단순한 구조 속에서, 인류학자가 직면하게 되는 사실적이고 갈등적인 문제들은 손쉽게 누락된다. 가령, 조깅을 하고 팝송을 들으며 양장차림을 하는 주인공이 이 외딴 동족부락에서 반드시 겪게 될 법한 경계인의 갈등을 이 영화는 그려내지 않는다. 외지인이되 외부자가 아니며, 마을의 합법적인 일원이되 결코 내부자가 될 수는 없는 주인공의 위치가 이처럼 아무 문제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기묘한 일이다. 지극히 소박하고 무딘 신참교사라 해도, 자신이 부임한 이 시골마을의 습속과 자신이 유지해온 삶의 양식 사이에서 적정한 협상의 지점을 찾기 위한 과정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도회지에서 온 이 세련되고 우아한 여성은 아무런 갈등도 없이 조깅을 하고 팝송을 들으며 양장차림을 고수한다. 이 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선생 김봉두>의 리얼리티가 더욱 빛을 발한다.
더욱이, 이 영화의 플롯에서 핵심을 이루는 주인공(수옥)과 문제의 남자(깨철) 사이의 관계는, 그것이 수반하는 의미의 중요성과 그것이 파생하는 문제들을 오히려 완전히 봉쇄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치명적인 결함은, 비오는 날 일어났던 ‘그’ 사건이 강간인가 정사인가의 문제를 넘어선다. 깨철의 성적 능력을 ‘실험’하기까지 했던 관찰자로서의 오만한 권위는 단숨에 해체되고, 주인공은 마을 전체의 미스터리를 단숨에 해결하는 놀라운 추체험으로 도약한다. 주체와 대상의 구도가 뒤바뀌고 관찰자와 참여자의 경계가 사라지며 기술(description)과 묘사에서 감정이입과 해석으로 전이되는 이 심각한 과정이, 단 한 차례의 성적 관계―강간이든 정사이든―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손쉽게 해결되어도 좋은 것일까? 아니, ‘해결’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갓 부임한 시골학교의 (여)교사. 그가 부임한 동족부락의 해괴한 남자. 그 남자의 존재를 둘러싼 마을의 미스터리. 그의 존재를 통해 점차 밝혀지는 마을주민들의 공모관계와 숨겨진 사실들. 미스터리를 풀고 그 마을을 떠나는 주인공.
압축하자면 이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이 영화의 플롯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단순하다. <안개마을>은 관객의 호흡을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끌어가는 영화가 아니며, 관객을 안일하게 만드는, 조금은 지루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부자연스러운 성우의 더빙이 영화를 압도하는 ‘옛날’ 영화여서가 아니다.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긴장의 힘이 약하고, 무엇보다 그 긴장이 너무 평면적이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텍스트를 접하면 반드시 가장 먼저 구분해보도록 주입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구조를 이 영화는 충실하게 답습한다. 애초에 평면적 전개를 피하기 위해 도입된 이 단계들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바로 그 성실한 답습으로 인해 교본의 안일함을 낳는다.
현장에 처음 발을 내딛는 인류학자[발단]. 그가 발견하게 되는 특정한 사실들[전개]. 그것을 둘러싸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현상들[위기]. 관찰/면접/참여관찰을 통해 해명되는 현지인의 맥락과 인류학적 발견[절정]. 현장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획득한 후 현장을 떠나는 인류학자[결말].
이 단순한 구조 속에서, 인류학자가 직면하게 되는 사실적이고 갈등적인 문제들은 손쉽게 누락된다. 가령, 조깅을 하고 팝송을 들으며 양장차림을 하는 주인공이 이 외딴 동족부락에서 반드시 겪게 될 법한 경계인의 갈등을 이 영화는 그려내지 않는다. 외지인이되 외부자가 아니며, 마을의 합법적인 일원이되 결코 내부자가 될 수는 없는 주인공의 위치가 이처럼 아무 문제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기묘한 일이다. 지극히 소박하고 무딘 신참교사라 해도, 자신이 부임한 이 시골마을의 습속과 자신이 유지해온 삶의 양식 사이에서 적정한 협상의 지점을 찾기 위한 과정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도회지에서 온 이 세련되고 우아한 여성은 아무런 갈등도 없이 조깅을 하고 팝송을 들으며 양장차림을 고수한다. 이 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선생 김봉두>의 리얼리티가 더욱 빛을 발한다.
더욱이, 이 영화의 플롯에서 핵심을 이루는 주인공(수옥)과 문제의 남자(깨철) 사이의 관계는, 그것이 수반하는 의미의 중요성과 그것이 파생하는 문제들을 오히려 완전히 봉쇄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치명적인 결함은, 비오는 날 일어났던 ‘그’ 사건이 강간인가 정사인가의 문제를 넘어선다. 깨철의 성적 능력을 ‘실험’하기까지 했던 관찰자로서의 오만한 권위는 단숨에 해체되고, 주인공은 마을 전체의 미스터리를 단숨에 해결하는 놀라운 추체험으로 도약한다. 주체와 대상의 구도가 뒤바뀌고 관찰자와 참여자의 경계가 사라지며 기술(description)과 묘사에서 감정이입과 해석으로 전이되는 이 심각한 과정이, 단 한 차례의 성적 관계―강간이든 정사이든―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손쉽게 해결되어도 좋은 것일까? 아니, ‘해결’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의 초입에서 관객들은 주인공을 향한 깨철의 묘한 시선을 통해 성적인 암시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마을사람들과 공존하는 기묘한 방식은, 이미 암시된 성적인 코드 속에서 상당 부분 예측 가능한 가설로 관객을 이끈다. 마을 여성들의 성적인 욕망은 단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너무나 쉽게 해소되고, 이에 대한 마을 남성들의 묵인은 너무나 간단하게 해석된다. 이 모든 설명의 열쇠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너무나 손쉽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관객은 안일해진다. 선천적인 모범생이나 수동적인 성실성을 미덕으로 삼는 이가 아니라면 교본을 펼쳐들고 진력을 다할 리 없듯이, <안개마을>에서 관객들은 인류학이 안고 있는 실질적이고 중요한 이슈들에 고뇌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이 교본은 정확히 현장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현장에서 나오는 순간까지를 인류학의 과정이라고 소개한다. 현장을 선택하고 진입하기까지의 과정, 현장에서 떠나 현장을 재현(represent)하는 결과물을 발표하고 그것이 읽혀지는 과정은 이 교본에서 모두 괄호 안으로 사라진다.
물론 교본의 유용성은 명백하다.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최소한’ 이 교본만큼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안개마을>을 둘러싼 안개의 실체에 대해 주인공이 보이는 태도처럼, 우리는 먼저 관찰과 질문, 발견과 해석 사이를 진자처럼 끊임없이 오가면서 ‘인류학자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교본이란 애초에 넘어서게 만들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을 발로 딛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