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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지위에쓰다

돌봄이 있는 주거공동체

돌봄이 있는 주거공동체 - 다세대 공동주택의 실험



1. 그 엄마들, 그 며느리들.

올해로 예순네 살이 된 엄마는 일흔의 아버지와 함께 아흔넷의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바늘로 찔러도 어느 한 구석 움찔하지 않을 듯 도도했던 할머니는, 이렇다 할 병도 없이 단지 오래되어 늙어버린 몸을, 지독하게도 시집살이시켰던 며느리에게 맡기고 누워 지낸다. 정작 온갖 병을 달고 살았던 엄마는 암수술을 하고 나서도 매일 할머니 몸을 씻긴다.

작가 노희경의 데뷔작이었던 2부작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암 선고를 받은 며느리는, 어느 밤 치매환자인 시어머니 방에 들어가 잠든 시어머니 얼굴을 베개로 틀어막으며, “나 죽으면 어머니 돌볼 사람이 누가 있어, 그러니 어머니가 먼저 죽어야 내가 죽지,”라고 흐느꼈다. 원수 같던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아이처럼 며느리만 따르고, 며느리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자식 돌보듯 대했었다. 그리고 종내, 자기 죽을 날을 받아들고서는 돌봐줄 사람 없이 남겨질 시어머니 생각에 우는 며느리.

그 엄마들, 그 며느리들. 온 사회가 돌봄의 심성을 거세시키며 성장하는 와중에, 그 결핍을 상쇄하기 위해, 사회며 시스템이며 제도며 가족들이며 온통 자기 몫을 내던지면 그걸 받아 안아 떠맡던 존재들. 그 엄마들과 그 며느리들은 이제 늙어 노인이 되고,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딸들이 어느덧 아이를 낳아,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다시 그 엄마들을 찾는다. 자식을 돌보고 시부모를 돌보고 남편을 돌보던 그 엄마들은 이제 또 자식의 자식들을 데려다 돌보고 있다.



2. 그 엄마들의, 딸들.

원치 않는 관계들이나 관계에서 파생되는 의무로부터의 단절이야말로, 마치 근대적 개인으로의 지향에 가장 어울리는 삶의 형식 같았던 때가 있었다. 그 무렵엔,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보면서도 사막 같은 브렌다의 모텔을 물들이던 자스민의 마술 같은 다정함보다 “사람들이 너무 다정해졌어요,” 라며 갑자기 짐을 싸 모텔을 떠나던 여자의 대사가 더 오래 가슴에 남았다. 건조한 단절을 택하는 편이 다정한 얽힘보다는 나아보였다. 관심과 참견, 애정과 간섭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가변적이며 흐릿했고, 그 흐릿한 경계에서 원치 않는 타인들의 개입은 언제나 다정함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엄마들’의 딸들은 그렇게, 관계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분투하며 성장했다. 독립적 자아를 가진 근대적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관계란 속박의 동의어이며 돌봄의 심성이란 강제적으로 부과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되뇌었다. 신화의 속박 안에 붙들려 있는 그 엄마들이야말로 딸들의 연민과 애증의 대상이었다. 돌봄의 심성은 속박을 내면화한 결과인 듯했고, 돌봄의 노동은 국가의 직무유기의 증거를 뜻했다.

그 엄마들의 삶은 딸들에게는 일종의 굴레와 같은 것이었다. 그 딸들을 비난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뒤늦게 ‘그 엄마들’을 찬미하면서, 그 엄마들의 삶 역시 ‘선택’인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 위선적 찬미와 강변은 딸들을 더욱 단련시켰다. 나이가 들어도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거나, 아이를 낳아도 다르게 길러보고자 했다. 딸들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딸들의 삶은 충만해지지 않았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다르게 살기 위해 모두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돌봄과 호혜의 욕구는 자본이 제공하는 솔루션을 소비함으로써 해소하고, 다문화적인 소통과 교류를 시도하기는 하지만 그 시도는 주거공간의 출입구를 경계로 닫힌다. 공동체를 꿈꾸지만 이웃이나 가족에서 파생되는 관계들로 돌아가는 것은 일종의 회귀이면서 패배인 것만 같다. 물론 최후의 보루는 있다. 공동체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시를 등져야 한다.



3. 메종 드 히미코, 혹은 팔랑스테르의 상상

여기 하나의 구상이 있다. 가족의 경계에서 빗장이 채워지는 그 가족이 아니라, 가족의 빗장을 열어두어 더 커지는 주거공동체에 대한 구상. 돌봄의 심성과 노동을 더 이상 ‘그 엄마들’에게 떠넘기지 않는, 그리하여 모두가 이제 더 이상 결핍된 존재로 살아가지 않기 위한 구상. 그런데 이 구상은 전연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였던 푸리에의 ‘팔랑스테르’의 꿈과 만나고, ‘메종 드 히미코’의 게이 노인들이 보여준 다정한 삶의 풍경화와 맞닿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오래 꿈꿔왔던 그것, 세기와 대륙을 넘나드는 공동체적 상상들과 행복한 접점을 만들어내며 이 구상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돌봄과 호혜의 이 주거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삶의 욕구들을 자본이 제공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주거공동체는 돌봄의 심성과 노동과 관계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를, 딸들과 아들들, 아버지들이 행복하고 지혜롭게 깨닫는 곳이어야 한다. 닫힌 문 안에서 다문화적인 소통과 어울림을 단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관문을 열어 이웃들과의 교류를 시작하도록 북돋는 곳. 한부모 가정의 식구들이나 다른 민족의 사람들, 비혈연적 가족이나 죽음을 앞둔 노인들의 존재가 자연스러운 삶의 한 형태로 존중받고 지지되는 곳.

이 주거공동체의 건축물은 이런 삶의 구상을 물질화하고 현실화하는, 가장 실용적인 상징물이어야 할 것이다. 주민들의 삶의 순환이 공간의 동선을 통해 소통하고 침투하는 구조. 이 건축물은 고가의 주상복합건물들이 창조해낸 공용시설과는 전혀 다른, 공적 공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 공적 공간 안에서 노인들과 아이들과 또 다른 이웃들이 서로에게 베이비시터와 간병인이 되어 서로의 삶을 북돋고 어루만질 것이다. 치매노인들의 존엄성이 존중받는 곳, 행복한 교실과 살롱과 극장, 공동으로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들어선 공간들. 무엇보다 이곳에는, 타워팰리스에서는 찾기 힘든 존재들이 있지 않은가. 바로 이 공적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고, 상호부조하고 노동의 책임을 나누는 주거공동체의 주민들의 존재다.

주거공동체의 예비이웃들, 주민회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교감을 나누는 가운데 공동체의 구상은 점점 더 구체화되어갈 것이고, 이따금 서로를 탄복시키고 경탄케 하는 제안들이 흥을 돋울 것이다. 이 행복한 북적임에 기꺼이 참여할 사람들이, 실은 너무 많이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너무 오래, 기다려왔던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2006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