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요일이 지나갔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많은 일들을 오늘 다 처리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심지어는 한동안을 벼르고 별렀던 행사장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지만 그 정문 입구에서 되돌아서야 했다. 돌아설 때의 기분은 의외로 꽤 초연하고 침착했다. 그때의 심정이란 마치 이런 것과 같았다; "나에게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일이란 없어. 이 정도는 별로 놀랍지도 않아." 이런 기분으로 선생에게 맞던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날이 떠오르기도 한다. 맞는 게 대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별로 두렵지가 않았었다. 아프지도 않았다.
근 며칠동안, 사람이 무언가를 <용납>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계기는 어쩌면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수업을 듣는 학생 중 하나가 수업 도중에 강의실에서 나가버렸다. 가끔 어둡고, 예민하며, 드러나지는 않지만 매우 공격적인 아이였다. 하지만 나에게 하루에 열개 가까이 친근한 문자메세지를 보내곤 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요컨대, 유리그릇 같은 구석이 있는 아이다. 쉽게 깨지고, 깨지면 날카롭다. 그러나 사실은 투명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존재들을, 지금까지 살면서 적지 않게 만나왔었다. 그들 중 일부와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유대감으로 연결되었다. 세계와 불화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일부와의 관계맺기는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자기 안의 상처에 대한 날카로운 예민함은 때로 타인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하게 만드는 독이 되기도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나는 그 점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리그릇 같은 그 고등학생 아이와 며칠새 여러 통의 메일을 주고받았다. 오늘 받은 메일에서 그 아이는 한없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자신의 문제인지 제발 알려달라고 했다. 아무 문제 없다고 토닥거려주어야 하는지, 그냥 무관심을 가장하며 지나쳐야 하는지, 혹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말로 설명하기 위해 시도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세번째의 경우가 최악일 것이다. 의도와 무관하게,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공격적이지 않은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그것은 아닌데 말이다.
결국엔,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실제로 이루어지는 상태의 진전이란 별로 없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노력이 무색하고, 결국엔 무익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절망감은 깊어지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게 되고야 만다. 그런 태도에 익숙해지면 애초의 절망감도 서서히 옅어져간다. 세포를 닫아버리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이런 종류의 것이다.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일요일이, 이렇게 흘러가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