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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어떤 승리"

KBS 스페셜, "어떤 패배"를 보다.
노회찬 대 홍정욱.
여론조사 내내 앞섰던 후보 노회찬은 왜 선거에서 졌을까.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고 나흘이 지난 후
오랜만에 여유롭게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머리칼이 쭈뼛하게 설 만큼 명료하게,
이미 알고 있던 그 이유를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다.

"한나라당 기호2 홍정욱, 노원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하버드 출신의 젊은 사업가,
한나라당 후보 홍정욱이 내건 선거 현수막의 구호는
그 어떤 정치적 구호보다 선명하고 직설적이며 선동적이었다.
그에 비하면 노회찬의, "우리 노회찬을 다시 국회로!"는
정치적 주장과 선동이라기보다 눈물겨운 호소이고 읍소였다.

아이 둘쯤을 가진 평범한 직장인 부부는
2008년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나.
그들이 꿈꾸는 것은 진보정치의 이상이나 일하는 자들 사이의 연대,
"부자에게 세금을" 걷고 "서민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사회가 아닌 것이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세계에 대해 꿈꾸지 않는다.
열 배로 뛰었던 강남의 집값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들 거처와 동네의 값어치가 좀 더 높게 평가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여기며
안쓰럽지만 불가피한 입시경쟁을 보란 듯이 뚫고
자신의 딸과 아들들이 명문대에 합격하는 것을 자랑스럽고 '명예'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의, 공정함, 자긍심, 명예로움 같은 가치들은
이렇게 사사화되어 삶에 대한 욕망으로 새롭게 배열되고 있다.

"노원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이 정치적인 선동의 구호 아래에서
누가 물을 것인가.
대체 노원의 "가치"란 무엇인지,
그 가치가 "올라간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당신의 삶에 대해 매겨지는 가치란 결국 부동산 가격이며 특목고이며 자립형사립고인 것인지,
집 한채 장만해서 평생 그 집 한채에서 살뜰하게 살아갈 당신들이
사고 팔아 이문을 남길 것도 아니건만
왜 복덕방 게시물에 적힐 숫자가 오르내린다고 그리 울고 웃어야 하는지.

2008년 대한민국은, 서울은,
뉴타운과 특목고, 부동산과 자립형 사립고로 들끓고 있다.
과거의 권력이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근대 권력의 새로운 양상은 사람을 "살게 만드는" 것이 되었다고, 푸코가 적시했었다.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꿈꾸고 구상하고 설계하고 관리하게 만드는 근대 국가의 권력.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개입하는 권력.

선거라는 장에서 과연
그 미몽에서 깨어나라고
제발 정신들 차리라고
뉴타운과 특목고의 환상에서 부디 벗어나시라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갈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겠다"란 명목으로
뉴타운과 자립형 사립고의 환상을 선동하며
노원의 "가치"를 올리겠다는 홍정욱을 두고,
노회찬은, 과연 어떻게 싸웠어야 했는가.

중요한 것은 "어떤 패배"가 아니다.
적어도 노회찬은 패배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승리",
결국 무엇이 승리하였는가의 문제다.

승리한 것은 단지 홍정욱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