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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지위에쓰다

'바라봄'의 철학과 불교의 자연주의

1. 싯다르타의 깨달음


지혜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지혜란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전달하려고 하면
늘 바보 같은 소리로만 들리게 되는 법이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Siddhartha> 후반부, 강가에서 오랜만에 해후한 옛 친구 고빈다가 깨달음에 관하여 연거푸 묻자 싯다르타는 위와 같이 답한다. 지혜란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단 전달되면 오직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릴 뿐이라는 그의 이 대답에 고빈다가 “자네 농담을 하고 있나?”라고 다시 묻자, 싯다르타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지식은 전달될 수 있는 것이지만, 지혜는 그럴 수가 없네. 사람들은 지혜를 발견할 수도 있고, 지혜롭게 살 수도 있으며, 지혜로 견고해질 수도 있고, 지혜를 통해 경이를 가져올 수도 있지. 하지만 누구도 지혜를 전달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나는 내가 아직 젊은이였을 적에 이것을 알아차렸네. 이것이야말로 나를 스승들로부터 멀리 떠나게 만든 이유였지.”


깨달음에 이르는 부처의 여정에 대한 일종의 변주(變奏)라고 할 수 있을 헤세의 이 작품에서 싯다르타는 이처럼 깨달음을 통해 얻어진 지혜란 결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진술은, 헤세의 이 저작이 문학의 텍스트를 넘어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텍스트로 읽히는 이유를 생각게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학과 종교와 철학이 궁극에 있어 왜 다르면서도 같은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어찌 보면 헤르만 헤세의 저작이 소재로 하고 있는 부처의 삶 혹은 불교의 가르침과 깨달음은 그 자체가 이야기(문학)의 형태를 띤 철학적 논의라는 점에서 문학과 종교와 철학 사이의 단단한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기도 하다. 또한 흥미롭게도, 위 헤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지혜에 관한 경구는 종교적이면서 독단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태도를 상기시킨다. 지혜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단지 덮어둘 수만은 없는 이상, 지혜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사이의 긴장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던 것 또한 같은 이치인지 모른다. 전달될 수 없는 지혜를 전달하려 하는 순간, 그 지혜는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게 될 뿐이다. “어떤 개념의 의미, 즉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언급해야 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자연의 사실, 즉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거의 언급된 바가 없는 그런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비트겐슈타인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사적’ 사실들에 대한 ‘바라봄’의 철학이야말로 불교 사상의 전반을 특징짓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을 불교 초기경전의 내용에 근거하여 주장하고자 한다. 먼저 불교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아론에서 시작하여, 실체론적 자아개념이 사라진 자리에 자연사(natural history)의 공간으로서 십이처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고, 십이처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주체 없는 윤회란 곧 연기의 인연화합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임을 논의한 후, 마지막으로 이것이 어떻게 ‘바라봄’의 철학과 맞닿아있으며 반(反)형이상학의 주장과 연관되는지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결국, 불교철학이 기본적으로 터하고 있는 반(反)실체론적 사유와 반(反)형이상학의 관점은 불교의 자연주의적 지평을 통해서 가장 잘 이해되고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측면은 자연주의의 기반 위에서 불교의 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태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을 받아들이고, 그 전제 위에서 불교 경전의 내용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견주어보게 될 것이다.


2. 사라진 주체, 남아있는 사실들


불교가 성립되던 당시의 인도의 모든 종교와, 당시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종교를 통틀어 불교가 가지는 고유하고 독특한 특징은 불교의 ‘무아(無我)’설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아설은 “불교의 두드러진 표식”을 넘어서 “불교의 다른 이름”으로까지 인식된다(정승석 1999: 15). 실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자아개념에 대한 불교의 거부가 이처럼 독특한 사상적 징표로 여겨지게 된 것은, 여타의 종교와 철학에서 그만큼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실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자아 및 주체개념에 대한 일종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체 개념은 한편으로 “정신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특권적인 접근”과 결부된 것이기도 하다(Rorty 1979).

그렇다면 먼저 불교에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정신”이 어떻게 부정되고 있는가를 주체의 문제에 앞서 살펴보도록 하자. 어느 날 ‘다제’라는 비구가 “내가 알기로는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법하셨다. ‘지금의 이 분별의식[識]은 죽으나 사나 변하지 않는다.’”라고 비구들에게 말한다. 이를 전해들은 부처는 다제를 불러 분별의식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다제비구는 “분별의식이란 말하고 지각하고 행하고 행하게 하고 홀로 일어나고 같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곳저곳에서 선악업을 지어 그 갚음[報]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부처는 다제를 꾸짖으며, 분별의식은 원인과 조건이 있어 일어나는 것이며 조건이 있으면 생기고 조건이 없으면 소멸하는 것임을 설파한다. 또한 그 조건에 있어서도, 눈의 분별의식이 눈과 모양과 빛깔이라는 조건에 따라 생기듯 귀, 코, 혀, 몸,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이치로 각각의 분별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임을 말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인간의 의식이란 항구적이거나 불변한 것도 아니고, 초월적이거나 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불교철학에서 인간의 의식은 이처럼 다른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여 생겨나고 소멸하며, 지각과 인식의 각 기관들의 작용의 합이라는 점에서 통일적인 실체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인간의 의식이 이처럼 실체적 자아개념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자아개념은 불교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밀린다 왕문경Milinda Pagt;은 밀린다 왕과 승려 나가세나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처음 만난 승려 나가세가에게 왕이 이름을 묻자 나가세나는 이렇게 답한다. “왕이시여, 저는 ‘나가세나Nāgasena’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의 종교적 삶의 동료들은 저를 “나가세나”라고 부릅니다. 저의 부모가 저에게 “나가세나”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만, … 그것은 단지 호칭이고, 말의 형태이며, 서술(description)이고, 일상적인 관행에 불과합니다. “나가세나”는 오직 이름일 뿐, 여기서 어떤 사람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Collins 1990: 182-183)

실체적 존재로서의 자아에 대한 부정은 불교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존재하는 것은 이름일 뿐 실체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가세나의 위와 같은 대답에 밀린다 왕은 만일 실체로서의 자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의복을 입고 음식을 취하는 자, 수행을 하고 열반을 깨닫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를 묻는다. 그가 보기에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생하는 자가 있어도 살생의 죄는 없게 될 것이며, 선악 행위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나가세나는, 왕이 타고 온 수레를 통해 비유로 답한다. 수레의 바퀴, 차체, 수레틀, 바퀴살, 채찍 등이 각기 수레인지를 묻고, 그것의 합이 수레인지를 묻고, 혹은 그것들 밖에 수레가 존재하는지를 물은 후, 이에 대해 왕이 모두 아니라고 답하자 과연 수레는 어디에 존재하는지 반문한다. 그 모든 것들에 의해 ‘수레’라고 하는 명칭, 호칭, 가명, 통칭, 즉 단순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라고 왕이 답하자 나가세나는 “당신은 수레를 올바르게 이해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와 같은 이치로 머리카락, 몸의 솜털, 두뇌, 용모, 감수작용, 표상작용, 형성과 식별작용 등에 의해 ‘나가세나’와 같은 명칭, 호칭, 가명, 통칭, 즉 단순한 이름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에서 실체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반(反)실체론적 사유는 불교사상의 고유한 측면을 이룬다. 형이상학적 주체가 사라진 자리, 즉 수레라고 불릴 만한 어떤 본질적인 실체가 사라진 자리에는 수레의 바퀴, 차체, 수레틀, 바퀴살과 같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五蘊, panca khandha)이 존재한다. 이러한 오온은 현상적 존재로서 끊임없이 생멸(生滅)하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常住)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먼저 살펴본 분별의식[識]의 경우처럼, 오온의 다른 요소들 모두가 조건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오온의 집합을 벗어난 초월적 자아를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자아 및 주체개념은 종교와 철학 전반을 지배해온 실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자아관의 속박에 얽매이지만 않는다면, 사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임이 쉽게 드러난다. 물질로서의 몸[色], 감정이나 감각의 감수작용[受], 표상이나 개념의 작용을 뜻하는 취상작용[想], 의지의 작용과 잠재적인 형성력 같은 모든 마음의 작용[行], 인식의 주관과 인식판단의 작용[識]을 초월하는 자아개념은 현상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또한 이들 각각이 불변하거나 영원하다는 것을 보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 각각의 요소들이 지속적으로 생멸변화하며 인간 주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쉽게 반박될 수 없는 것이다. 입증할 수도 없으며 반박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실체론적 존재를 고집하는 것은 허상에 대한 집착이다.


부처가 입적한 후 ‘천타’라는 비구는 ‘무아’라고는 하지만 현재의 ‘나’는 분명히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품고 아난을 찾아간다. 그러나 아난은 무아의 참뜻은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양극단이 아니라 중도의 연기법에서 찾아야 한다며 이렇게 답한다. “세상의 발생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면 세상이 없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고,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면 세상이 있다는 견해가 생기지 않는다. 가전연이여, 부처는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설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는 것이다.”


세상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라는 가르침은, “본다”는 것에 대해 상세히 논한 후, “받아들여야 할, 주어진 것을 우리는 삶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PI xi.)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떠올리게 만든다. 생성소멸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오온들의 결합이 인간의 존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오온의 결합은 이를테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인간존재의 삶의 형식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3. 불교철학의 자연사(natural history)


이와 같이 실체론적 자아가 부정되고 형이상학적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또는, 인간존재와 세계에 대한 해명이 종교의 지향이라면, 자아와 주체개념에 있어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고 있는 불교는 이 세계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를 무아설의 자아관 만큼이나 독특한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인 십이처(十二處)설에 관해 살펴보도록 이끈다.


어느 날 ‘생문’이라는 비구가 부처를 찾아와, “일체(一切)라고 하는 그 일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서 ‘일체(sarvam)’라는 말은 모든 것(everything)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인도에서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사용되었는데, 생문은 이 일체에 대한 부처의 견해가 어떠한지를 묻고자 한 것이다. 이에 부처는 생문에게 이렇게 답한다. “일체는 십이처에 포섭되는 것이니, 곧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을 이름 하여 일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십이처를 떠나 다른 일체를 설하려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에 지나지 않을 뿐, 다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의혹만 더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십이처를 떠난 다른 일체―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이처는 인식의 기관인 육근(六根)과 인식의 대상이 되는 육경(六境)을 칭하는 것으로, 눈・귀・코・혀・몸의 오근(五根)에 이를 통솔하는 의(意)를 합한 육근과, 육근이 인식하는 대상으로서 눈으로 보는 것[色境], 귀로 듣는 것[聲境], 코로 냄새를 맡는 것[香境], 입으로 맛을 아는 것[味境], 몸으로 부딪혀 아는 것[觸境], 마음으로 느껴 아는 것[法境]을 합한 육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전부 이러한 십이처 속에 존재하며 거기에서 비롯된다. 세계의 일체가 인식의 기관과 대상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보는 십이처설은 종교로서의 불교가 가지는 독특한 세계관을 명료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궁극적인 원리나 초월적 실재에서 출발하여 인간존재와 세계를 설명한다. 이에 반해 종교로서 불교가 가지는 독특함은, 십이처설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듯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인간존재와 세계 자체에 대한 관찰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만을 확실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의 방식은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범천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범천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 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라는 부처의 설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실체론적인 자아를 부정하듯, 세계에 대한 질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실재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철학이 바라보는 세계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자연사(natural history)와 놀랍게도 동일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인간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이다. 그러나 그것은 호기심 어린 기여가 아니라, 항상 우리 눈앞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확인이다.”(PI 415)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것과 같이 “아무도 의심하거나 주목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확인”이라는 점에서, 십이처설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세계관은 종교적 세계관으로 보기에는 일견 매우 단순해보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모든 존재를 인식의 기관과 인식의 대상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적 관점은 죽음에 관한 사유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죽음의 문제는 불교사상에 있어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룬다. 애초에 부처(석가)의 출가 역시 바로 이 죽음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삶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조모를 잃고 슬픔에 빠진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에게 부처는 “일체중생은 죽는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니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며 “죽은 육체에 매달리지 말고, 살아서 선업을 쌓을 것”을 설한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이처설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보듯, 또한 오온설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자아관에서 보듯,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태도는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즉 불교에서 죽음은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며, 구원이나 내세 역시 부정된다. 부처는 “일체 중생, 일체 벌레, 일체 신(神)으로 난 것은 이내 죽어 마침내 다함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며 이렇게 설한다: “목숨과 더운 기운과 알음알이[識]는 육신을 버릴 때 함께 버린다. 그 육신을 저 흙무더기 속에 버려 버리면 마음이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 … 목숨과 더운 기온을 버리면 모든 근(根)은 다 허물어져 육신과 목숨은 분리된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죽음의 문제에 관한 불교의 이 같은 단호한 태도는 현상적 측면과 인식적 측면이라는 두 차원에서 모두 나타난다(이덕진 2001). 현상적 측면에서 죽음은 목숨과 체온과 의식이 사라지고 신체의 모든 기관이 모두 파괴되어 육신과 생명이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몰락과 사멸, 시간의 다함, 더운 기온의 떠남, 오온의 완전한 분리와 해체 등을 죽음이라 일컫는 것이다. 인식적 차원에서의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부처는 일체 중생, 일체 벌레와 같은 모든 중생의 무리들, 모든 태어난 것들과 살아있는 것들은 차례차례 죽어간다고 말한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4. 윤회에는 주체가 있는가


죽음의 문제에 관하여 앞에서 살펴본 불교의 가르침은 일견 불교의 윤회설과 상충하는 듯이 보인다. 실제 불교 사상에서 윤회설은, 다른 불교의 가르침과 여러 부분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윤회설은 불교의 고유한 사상이 아니라 불교의 성립 당시 인도의 다른 종교들로부터 불교가 수용한 것인데,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실체론적인 종교들은 현상적으로 경험되는 자아와는 구별되는 실체로서의 자아를 제시하며, 이를 윤회 속에서 불변, 불멸하는 자기동일적 실체로 간주한다. 반면에 불교의 철학은 앞에서도 논하였듯이 현상 배후의 자기동일적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한다. 현재에도 죽음 이후에도 이러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동일적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부정은 윤회설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설과 무아설 사이의 긴장을 불교철학이 풀어야 할 난제로 보는 견해들이 생겨나게 된다.


대표적으로 김진(2000)은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교의 핵심적인 전제인데, 이 둘 사이의 모순적 관계로 인해 불교철학은 아포리아에 직면해 있다고 본다. 더욱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은 모두 실패하였기 때문에, 불교철학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자아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칸트식 요청적 사유방법론이 요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첫째, 불교 사상의 핵심에 대한 잘못?견해, 둘째, 무아설에 대한 몰이해, 셋째, 연기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인해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를 차례로 살펴보면, 첫째, 윤회는 불교철학의 핵심적 사상이라 볼 수 없다. 불교적 사유의 핵심은 연기와 무아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무아설에 대한 몰이해는 “어떤 형태의 형이상학적 주체 개념이나 자기 동일성 또는 본질을 담보하고 있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든 가능한 철학적 사유나 윤리적 실천, 그리고 종교적 희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담론윤리학적 지평상실인 동시에 지반해체”라는 언급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김진 2000: 172-173). 그의 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살펴본 무아설의 기본 이치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연기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연기 현상 배후에서 자기동일적 자아를 인정하면 윤회론이 되고 부정하면 무아론이 되어, 무아론과 윤회론은 서로 상호 모순적 개념이 된다는 그의 주장에서 확인된다. ‘무아연기(무아론)와 유아연기(윤회론)’를 대립시키는 그의 이러한 견해는 기본적으로 연기설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연기는 무아를 근거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밀린다 왕문경Milinda Pagt;에서 밀린다 왕 역시, 무아와 윤회가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나가세나에게 “다시 태어난 자는 사멸한 자와 동일합니까, 혹은 다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나가세나는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다고 답하면서, “갓난아이 시절의 당신과 지금 성인이 된 당신은 동일한 사람입니까?”라고 되묻는다. 갓난아이와 성인, 초저녁의 불꽃과 한밤중의 불꽃이 서로 같지도 다르지도 않듯, 생성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은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에 의존하여 다른 것이 생겨나며 동시적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처럼 영혼과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윤회를 인정한다. 이것은 연기적인 세계의 생성, 변화 과정은 아(我)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 즉 윤회는 아(我)가 없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정승석 1999: 121; 안옥선 2004). 앞에서 우리는 불교에서 죽음은 목숨과 체온과 의식이 사라지고 신체의 모든 기관이 모두 파괴되어 육신과 생명이 분리되는 것, 즉 몰락과 사멸, 시간의 다함, 더운 기온의 떠남, 오온의 완전한 분리와 해체를 뜻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죽음이라는 단절로부터 어떻게 윤회의 연속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연기인 것이다. 등잔의 불꽃이 하나의 심지에서 다른 심지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로 인해―불꽃 자체가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그 불꽃이 생겨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Collins 1990: 187).


일체 존재가 생멸변화하고 이합집산하는 과정에서 상주하는 법칙으로서의 연기는 인과율과 인연화합, 상의상관, 법주법계로 설명된다. 모든 것은 무상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일정한 법칙으로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사물의 생멸변화에는 인연화합의 조건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상의상관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의 상주성을 법주법계라 한다. 이 등잔의 불꽃으로 저 등잔에 불을 붙임으로써 이 등잔의 불꽃은 사라지고 저 등잔의 불꽃은 생겨난다. 이러한 연기의 법칙 속에서 개개의 불꽃은 피어났다 꺼지고,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십이처를 벗어나지 않는, 오온의 결합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죽음과 함께 완전한 사멸에 이른다는 것은 윤회설과 모순되지 않는다. 윤회는 넓게 보아 연기의 이치에서 파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연기에 대하여 설한 직후, 이를 깨달은 자는 과거에 대하여 ‘나는 과거세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과거세에 어떻게 존재했는가?’와 같은 생각을 갖지 않고, 미래에 대하여 ‘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미래세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무엇으로 말미암아 미래세에 존재할 것인가?’라고도 묻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더욱이 자기 자신의 자아에 대하여 ‘이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무엇인가? 이 중생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어떤 원인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어떤 원인으로 존재할 것인가?’라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연기는 그 자체가 무아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아윤회 즉 연기란 “언제나 드러난 현상으로서 존재하며, 그 변화 가능성은 예단할 수 없으나 언제나 상호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단 하나의 존재사실에 불과하다. 이 경우에 차용되는 윤회라는 개념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인격 주체의 환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속에 모든 것이 뒤섞이는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의존하여 있고, 모든 것으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업과 윤회, 그리고 해탈이라는 말마디에 집착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물음(김진 2000: 172)은, 앞에서 보았듯 불교철학이 기본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자연사(natural history)의 사실들이 종교적 수행과 구도의 차원에서 볼 때 너무나 단순하고 일반적인 사실에 불과하다는 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자연사적 사실들이며, 여기에 불교의 가르침과 깨달음의 정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은 사실을 “원초적 현상”으로 보아야 할 곳에서, 즉 우리가 이 언어게임이 행해진다고 말해야 할 곳에서 설명을 구한다는데 있다”(PI 654)는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떠올려볼 대목이다.


5. ‘바라봄’의 철학과 반(反)형이상학


다시 <싯다르타>의 장면으로 되돌아가보자. 싯다르타와 옛 친구 고빈다가 오랜만에 해후하는 그 강가에서, 고빈다는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구도자로 보이는 늙은 뱃사공에게 고빈다가 한마디 청하자, 뱃사공 싯다르타는 “당신은 아마도 지나치게 많이 구하고 있어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운을 뗀 후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가 구도를 할 때에는 오직 자신이 구하는 것만을 보려 하기에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기 쉽습니다. 자신이 구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목표를 가지고 있어 그 목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무언가를 구한다는 것은 목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발견한다는 것은, 자유롭고 열려있으며 아무런 목표도 없다는 것을 뜻한답니다.”(Hesse 1992: 95)


고빈다와 싯다르타, 구도(seeking)와 발견(finding) 사이의 이러한 대조는 우리에게 여타의 종교와 불교의 차이, 형이상학적이고 실체론적인 사유와 자연주의적 태도의 차이를 환기시킨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우리 앞에 모든 것들을 단지 놓아둔다. 그리고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연역해내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우리 눈앞에 놓여있기 때문에 설명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PI 126)고 말한다. 이처럼 자연주의는 인간을 제약하는 자연사(natural history)의 일반적 사실 혹은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으며, 그러한 제약 조건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 한다(이승종 1993: 173-174).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실제 사람들의 삶의 형식이나 생각으로부터 유도되어 파생된 것들은 이차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바로 이처럼 (잘못) 파생된 것들로 인해 우리가 철학적 질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이승종 1993: 175-176).


이와 같이 철학은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주 일반적인 자연사의 사실을 고찰하는 것이며, 이 고찰의 근본 양식이야말로 바로 ‘바라봄’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이승종 2003). 헤세의 싯다르타가 무언가를 구하는(seeking) 대신 발견하는(finding) 것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처럼, 그가 말한 그대로 목표를 버리고 자유로워지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바라봄의 철학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다시 이 글이 시작한 첫 장면으로 돌아가자. 지혜란 전달될 수 없는 것이며, 전달하려할수록 그 지혜는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게 된다고 싯다르타는 말하였다. 그리고 이어, 자신이 깨달은 바를 고빈다에게 전한다. “모든 진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똑같이 참이라네. 진리는 오직 일면적이어야 표현될 수 있으며 말로 덮어씌워질 수가 있지. 말로 생각되고 표현되는 모든 것은 일면적이며, 오직 절반만 참이라네. 그것은 모두 총체성과 완전성,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지. 그렇기에 부처께서 세계에 관해 가르치실 때, 그도 세계를 윤회와 열반, 허상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거라네. 그렇지 않고서는 달리 가르칠 방법이 없지.”(Hesse 1992: 97)


헤세의 싯다르타가 전하는 이러한 깨달음은, 연기를 설한 후에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 하듯 깨달음을 얻으면 바른 가르침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고 한 부처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물은 고기를 잡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고기를 잡고 난 뒤에는 버리는 것이다. 사다리를 다 오르고 나면 사다리는 버린다. 부처가 취한 가르침의 방법은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방편은 강을 건너고 난 뒤 버려져야 하는 뗏목처럼 잠정적인 의미와 기능만을 가진다. 불교에서 사용되는 비유와 방편은 보편화와 총체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설이며, 총체화적 지배담론에 대한 비판이자 거부로 읽힐 수 있다. 불교의 핵심 개념인 불립문자, 제법무아, 일체개공 역시 필연적으로 일체의 형이상학과 형이상학적 체계 및 이론을 부정하는 불교적 관점을 드러내준다(박경일 1999: 100). 불교에 명확한 정전(canon)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정불변하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하고, 이 세계를 초월하는 어떤 섭리나 근원, 신적인 실재를 부정하며, 오직 만물이 서로 연(緣)하여 기(起)한다고 보는 불교의 사유방식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존재를 받아들이고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자연주의 철학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불교의 철학은, 그러므로 서양 철학에서 드물게 자연주의적 태도를 견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독창적 사유와 핵심적인 측면에서 맞닿아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듯,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물의 측면은 그 단순함과 평범함 때문에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이 언제나 그의 눈앞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에 주의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PI 129). 그러나 바로 그 중요한 사물의 측면과 사실들,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하는 데서, 우리의 삶은 이루어지는 것이다(OC-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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