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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애정과 지식

어렸을 적부터
난 팬덤에는 익숙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저 수다꺼리로 어떤 연예인이 좋다고 아우성치는 때가 있긴 해도
실제로 어떤 인기인에 열광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진을 가지고 다닌 일도,
김현식이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어떻게든 '의례화'하고 싶은 마음에
신문에 났던 우표 크기의 그의 사진을 오려
수첩에 넣어둔 게 전부였다.
홍콩영화배우에 열광한 적도 없고
농구경기를 꽤 즐겨본 편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좋아하는 농구선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럴 수도.
좋아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역시 '결정'이나 '의지'의 영역이다.
이건 최선생과 내가 늘 공감하는 문제 중 하나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 역시
아주 단순하고 사소한 결정의 결과인 것이다.

아무튼
나는 박지성이 좋다.
지난 월드컵 때, 어린 나이에 자신 있게 슛을 쏘는
박지성의 그 포즈가 너무 좋았다.
박주영을 보면서 감탄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박지성이 더 좋다. 먼저 좋아했으니까.

오늘 우연히 박지성의 팬클럽 사이트를 알게 돼서
그래, 나도 한번 팬클럽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잠깐의 망설임 끝에 흔쾌히 [가입하기]를 눌렀는데,
어마어마한 질문화면이 펼쳐지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 질문들을 대강 (읽지는 않고) 쳐다보며
역시, 애정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애정을 가지기로 '결정'하는 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인가
잠시 생각했다.
애정이란 으레 대상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는 것이다.

문득, 예전에 한 남자친구와
갓 연애를 시작할까 말까 하던 무렵
다른 일행들과 밥을 먹으러 갔을 때 생각이 난다.
그가 나에게 "넌 찌게에 들어있는 두부는 안 먹잖아"라고 말하자
나는 깔깔 웃으면서,
"어쩜 그렇게 기억력이 좋아요? 별걸 다 기억한다~" 하고 대답했는데,
옆에서 함께 밥을 먹던 능청스런 선배가 장난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력? 너는 로미오가 줄리엣에 대해서 기억력이 좋다고 말하니?"

애정이 필연적으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수반하는 것이라면
역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과 비용의 투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고보면 나는 박지성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