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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추억은 아무 힘이 없어요

추억은 아무 힘이 없어요.

 

입을 반쯤은 벌리고, 신이 나서 목을 빼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가 만나 마주앉은 씬에서

하지만 둘 중 어느 누구에게도 적의가 없는 것을 보면서

역시, 참 간만에 멋진 드라마야,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리다가,

그러다가 3년만에 돌아온 여자에게 지금의 여자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고 그만,

가슴이 싸아, 했다. 추억은 아무 힘이 없어.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어떤 여자와 마주앉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문득 생각했다.

내가 만나 연애하고 혹은 사랑했던 남자들의

더 과거의 여자들 혹은 그 후의 여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참 정겨운 감정에 가까운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관심에 한층 더 가까운 것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모종의 적의가 아니라는 건 분명한데,

그런데 왜 모든 동화책들이

여자아이들에게 여자들을 적대하라고 가르쳤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한밤중에 마당에 나가 앉은 그녀가 속으로 말한다.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 여자를 부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했을까를 질투하는 것이다, 뭐 이런 류.

 

그 여자의 그 독백을 듣고 있노라니

역시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은

possibility의 시간들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실현되지 않은 무수한 가능성들이

사람을 미치게 하고, 돌게 하고, 참담하게 하고,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쓰다보니 최영미 시가 생각나네.

아무튼,

드라마는 MBC.

 

한동안 행복할 거다, 내 이름은 김삼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