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액츄얼리>의 한국판이란 이야길 하도 들어서인지
연휴의 한토막을 기꺼이 바칠 만한
경쾌하고 따뜻한 영화일 것으로,
그러나 애시당초 모조품 영화일 것으로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러브액츄얼리>를
dvd를 소장하고 싶을 만큼 기분 좋은 영화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목 놓아 울지는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임창정은,
단역 시절 일을 마치고 터덜터덜 비탈길을 올라가
지하셋방이던가, 자기 집으로 들어서는 그 쪽문 앞에 서서는
그 쪽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주저앉아
소주를 마시며 울었었다고 했다.
나의 스물 몇살은, 왜,
아침이면 이 문에서 나와, 밤이면 이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그 생각을 하고 또 하며 울었다고 했다.
쪽문 앞에서 소주를 마시며 울던,
그 문에서 나와 그 문으로 들어가던 임창정을
그대로 드러내준 영화.
연극 하던 시절에는
비극만 했었다는,
그래서 처음엔 코미디 영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그 김수로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
울고 웃게 만드는 인간군상들이
영화 곳곳에서 스쳐지나가며 또다른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걸 보며
이 영화 참 불교적이군, 하며 웃다가도
이런 새롭지 않은 플롯들이 사실은 얼마나
영화라는 장르를 느끼게 하는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영화라는 장르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을
이 다종다양한 인간군상의 면면을 느끼며
아, 나도 영화를 찍는다면
아마 바로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겠군, 이란
생각마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했다.
왕가위가 <동사서독>을 촬영하던 도중에
즉흥적으로 <타락천사>를 만들었듯이,
박찬욱이 만일 어느 날엔가 문득
아주 가벼운 멜로 풍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져 충동적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바로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비극성이
이 영화에는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도저에 흐르는
감출 수 없는 따뜻함.
그 따뜻함의 뿌리는
멜로의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고유성을 진득히 바라보려 하는 시선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물론 조금은 과장된 찬사이기도 할 테지만.
막 영화를 보고 난 후 쓰는 글에
찬사든 비난이든 과잉된 것은 별로이지만,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는 니체의 한 마디가
멜로와 코미디, 로맨스와 드라마를 뒤섞은 이 영화의 눈동자에
결정적으로 진한 점 하나를 찍고 페이드 아웃 되어갔다.
그리하여 나는 자꾸 그 한 마디를 중얼거리고만 싶어진다,
"몇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삶의 비극성과 경이,
이 삶을 전개시키는, 두 개의 수레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