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읽다 이진경의 신간 소식을 접했다,
미래의 맑스주의.
"그런데, 이진경과 수유+너머를
불온하게 여기고 두려워할 이가 과연 있을까," 라는 식의
질문으로 끝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유물론의 핵심을 '물질'이 아니라
'외부'에 의한 사유로 보는 것이
이진경의 새로운 관점인가? 란 생각을 했다.
'내부에 의해 스스로 완결되는 사유'로서의 관념론은
이제껏 많은 맑스주의자들이 견지해왔던 태도이기도 하고
(기사로 보건대 이진경이 이렇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바로 관념론으로 보는 것은 대단히 옳은 지적이다.
맑스주의 이론 자체에 내재된 관념론적 요소는 없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기계와 문명조차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관점은
매우 반가웠고,
무엇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은 다르다, 는
이진경의 주장 앞에서 잠시 멈춤.
노동계급이 조합이라는 근대적 조직체계로 포섭되고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이 체제 외부가 아닌 체제 내부화되면서
정작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존재들이란
갈수록 늘어나는 니트족, 히키고모리, 출산기피여성 등
패션잡지의 뛰어난 피쳐에디터들이 주목하는 사람들.
그렇다면 맑스주의의 핵심은 뭘까?
착취의 메커니즘으로서의 자본주의, 이걸 버리고
맑스주의의 정치경제학을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정작, 문제는 착취의 메커니즘에 포섭되는 인구는
갈수록 소수화하고, 그 바깥의 인구들이 늘어간다는 것.
착취의 메커니즘은 정교한 근대성을 보여주는데
그로부터 자의든 타의든 이탈한 자들이 증가한다는 것.
그리고 그 착취의 메커니즘을 욕구하지 않는 자들 또한 늘어난다는 것.
(이것은 그 메커니즘의 두 주체 모두를 불안하게 하는 현상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과연 이진경의 새 책을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게으름 탓일 수도, 아닐 수도.
이런 주제로 밤이 깊도록 토론할 만한 사람도 얼마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