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던지기
20090527
에코echo
2009. 5. 28. 16:06
음악이었나 그림이었나. 아무튼 언제였는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오래 전 언젠가, 언어 이전의 장르에 불현듯 매혹되어, 언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마치 큰 깨달음이라도 되는 양 새삼 절감한 일이 있었다. 언어의 불완전함에 대한 그토록 강렬한 깨달음이란, 역설적이면서도 당연하게도, 내가 얼마나 언어에 집착하는 인간인지에 대한 강력한 반증이었다. 나는 언어가 없는 세계에서 존재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속으로 끊임 없이 말을 하고 글을 쓴다. 누군가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소리 없이 무언가를 계속해서 허공에 적는다. 열 일곱 살 무렵까지,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 그렇게 살아가는 줄로 알았다.
나는 언어를 통해 받아들이려 하고, 언어를 통해 해명하려 한다. 그리고 결국 언어의 집에 종종 갇힌다. 내가 만든 감옥에 갇히는 순간조차 나는 포기하지 못한다. 언어를 통해 완전해져야 한다고. 사물과 사태와 사고와 감정이, 언어를 통해 명징해져야 한다고. 언어를 통해서만 모든 것이 명징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언어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명징함, 그리고 언어가 그 명징함을 담보한다는 믿음. 내가 이로부터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다른 그 무엇 이전에, 그저 먹고 자고 싸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늙어가고 죽어갈, 그냥 이렇게 세상에 내던져져서 존재하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언어를 통해 명징해지고자 하는 이 저주스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언어를 버릴 수 있을까? 사물과 사태와 사고와 감정을, 명징하게 나타내고 명징하게 이해하고 싶어하는 이 욕망을 버릴 수 있을까? 존재했던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그대로를 그냥 내버려둘 수 있을까? 지금 나는, 몇 시간째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로부터 불교로의 개종과도 같은 일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나의 욕망이 얼마나 절대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초라할 정도로 허약한 것인지를. 창조주와 구세주의 절대성이란, 절대적인 만큼 허약한 기반인 것이다. 아무리 많은 적확한 언어를 동원한다고 해도, 결코 사물과 사태와 사고와 감정의 실제에는 도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