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가는대로

아름다운 것들

에코echo 2009. 2. 5. 15:10
참 괴상하기도 하지.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시험기간만 되면 이상하게
꼭 편지함을 정리했었다. 매일 얼굴 보는 친구들의 편지도 하나씩 꺼내
어 다시 읽어보고, 오래된 편지들을 찾아 읽으면서 잡념에 빠지곤 했다.
이번 주말에 발표가 있는데, 발표 준비 한답시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는
여기 저기 둘러보는 맛이 또 일품이다.

그러던 와중에, 오랜만에 친구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나 구경해야겠다고
주소창에 주소를 입력했다.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의 미니홈피였다.
그냥 닫고 나오려는데, 미니홈피의 제목이 "스무살입니다. 별거 없습니
다" 였다. 그 말이 왠지 좋아 무심코 몇 번 클릭하는데, 정말이지 별 거
없는 스무살의 인생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구경하고 말았다.

사진첩에 있는 그 스무살의 여자아이는, 서울에서 늘 어디서나 마주치
던 십대 후반이나 갓 스물 넘은 여자애들과 꼭 같았다. 깻잎 머리라고
불리는 특유의 애교머리, 그리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남자애들과 비슷
비슷한 카페에서 찍은 비슷비슷한 사진들. 나는 아직 여리고 여전히
쉽게 상처받는데, 왜 성숙함을 연기해야 하느냐는 항의성의 일기들.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친구들은 어떻게 성장해갈까? 애정을 가진 사람
들에 대하여 나는 곧잘, 그들이 더 많이 상처받고 더 고통스럽게 성장
해가길 기원해왔다. 그것이 훨씬 더 살아볼만한 인생이라고 여겼던 것
이다. 그런데 이 생면부지의 스무 살 인생을 잠시 들여다보다 말고, 나
는 부디 그가 덜 상처받고 덜 고통스럽게 성장하기를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얼마 전에는 후배가 번역한 책을 검색하다, 도서 판매 사이트에서 제공
하는 북 리뷰 블로그 같은 곳에 우연히 도달했다. 나의 취향과는 정반대
의 책 리뷰를 잔뜩 올려둔 블로그였는데, 그 블로그 대문에 "부족하지만
조금씩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적혀있었다. 그 말이 너무 좋
아, 그 페이지를 차마 닫지 못하고 며칠동안 구글크롬 안에 열어두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숨어 꿈틀거리고 있다. 깻잎 머리의
소녀들은 별 거 없는 스무 살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그 안에서 꿈꾸고
절망하며 견디어내고 있다. 자기지침서적들을 읽고 서평을 올리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떤 젊은 남자는, "부족하지만 조금씩 발전하려고 노력
하고 있어요,"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것들이 내 마음을 가볍게 흔들고, 또 그렇게 흔들고
울리며 나를 가르친다.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악덕이라 여겼던, 더
많이 상처받아 더 고통스럽게 성장하기를 원했던 나에게는 신비와도 같
은 일들. 아무튼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숨어 꿈틀거리는 세상 한켠에서,
오늘 밤에는 기어코 발표 준비를 마칠 것이다.

내일은 보스턴에 온 후로 네 번째 뉴욕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