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던지기
20090114
에코echo
2009. 1. 16. 12:36
거의 매일 집에서 연구소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다닌다. 셔틀버스 운전하는 사람들 얼굴이 이제 익숙해졌고, 몇 사람과는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유독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몇 주 전, 새벽 두 시쯤 버스를 타는데, 한참 빈 버스만 운전했다며 젊은 흑인 남자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누구나 한 눈에 좋아할 사람이었다. 쾌활하고 명랑하고 친절했다. 쾌활하고 명랑하고 친절한 사람을 만나니, 나도 덩달아 쾌활하고 명랑하고 친절해졌다. 그는 나더러 자기가 만나본 학생들 중에서 최고의 성격을 가졌다고 했다. 당신은 내가 아는 버스 드라이버 중에서 최고의 성격을 가졌다고 나도 화답했다. 수상소감을 말하는 배우처럼 얼굴 위로 두 손을 맞잡아 흔들면서, 고맙다며 그가 깔깔 웃었다. 나도 따라 깔깔 웃었다. 쓰레기 청소하는 차가 지나가자, 저 일을 하면 돈은 많이 버는데, 냄새가 난다고 그가 또 깔깔 웃었다. 나도 내내 깔깔 웃었다. 버스 내릴 즈음에는, 다음에 내 버스를 꼭 타길 바란다고 그가 말했고 나도 꼭 당신 버스를 타길 기다리겠노라고 답했다.
그는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쳣 번째 미국인이었다. 버스에서 내릴 때 한국말로 "안녕"이라고 인사해준 그의 이름은 Melvin 이었다. 그 후로 내내 셔틀버스를 탈 때마다 내심 그를 기다렸지만 한번도 그의 버스를 타지 못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다른 드라이버들도 있고, 그 후로도 나의 이름을 물어주는 셔틀버스의 드라이버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지난 며칠은 계속 그게 아쉬웠다. 다시 그 버스를 타게 되길 고대했다. 그리고 어느 밤인가, 내가 왜 그 버스를 그렇게 기다리는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너무 고학력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내 삶의 어느 시점에서도, 이렇게 고학력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적이 없었다.
페이퍼를 쓰고 나면 아주 극심한 우울에 빠진다. 내가 쓰는 글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내가 하는 공부가 의미가 있는 것인지, 다른 방식으로 사회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삶이 아닌지, 이런 생각들에 휩싸이는 게 두렵다. 그리고 그 두려움과 우울을 잊기 위해, 혹은 견디기 위해, 바삐 집으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본다. 어제는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견디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아는 선생님들에게 모두 묻고 싶어졌다. 어떻게 견디세요? 라고. 그날 나는 하루 종일 메르세데스 소사의 Gracias a la vida를 한 곡만 반복해서 들었고, 멀리 떨어진 캠퍼스로 가는 다른 노선의 셔틀버스를 타고는 한참 창밖을 보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좋아하는 시트콤 채널을 틀었고, 자기 와이프가 가슴 확대 수술을 한 줄 알고 좋아하는--그러나 좋은 걸 차마 내색하지 못해 쩔쩔매는 이탈리아 남자의 표정을 보며 웃었다.
시시껄렁한 내 친구들이 너무 그립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을 가지고 몇 시간이고 킬킬댈 수 있는, 그 대책 없는 사람들이 그립다. 내 뒷통수나 어깨를 툭 쳐줄 것도 같은, 툭 치면서 "에이그," 라고 혀 차며 웃어줄 것 같은, 그 정다운 인간들이 그립다. 며칠 전 별안간 사진 폴더를 뒤지던 밤에 내 앞에 나타나준, 서른이 넘어도 여전히 추태 투성이인 대학 동기며, 고작 예닐곱 번 본 게 전부인 황당한 개그작가도 그립다. 헛점 투성이에다 헐렁헐렁한, 불완전하고 결점 많은 사람들. 그 속에 뒤섞여 지내던 시절이 그립다. 아무튼 돌연, 그리운 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