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가는대로
권총 강도
에코echo
2008. 10. 14. 12:23
권총 강도를 당했다. 밤 여덟시에서 아홉시 사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켓에서 장을 보고 들어가던 길.
몇 사람이 뒤에서 걷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바로 눈 앞에 불 켜진 아파트의 야경이 보였는데 내가 아주 좋아하는 풍경이어서, 그 독특한 불빛을 기분 좋게 쳐다보며 걸었다. 그러다 뒤의 일행이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기에, 길을 막고 걷는 게 아닌가 싶어 잠시 길 귀퉁이로 비켜섰다. 곧 세 사람이 지나쳐 갔다. 그렇게 지나쳐 갈 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이 돌아섰다. 그들의 손에 권총이 있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것은, 권총을 발견하자마자 내가 떠올린 영상이었다. 나는 영화에서 등장했던 가장 끔찍한 죽음의 하나로 늘 "첨밀밀"에서의 표형의 죽음을 생각하곤 했었다. 아무 개연성도 없는, 그저 '탕'하는 총소리와 함께 발생한 죽음. 아무 개연성 없는 죽음의 공포가, 펄떡펄떡 살아서 바로 내 목전에 있었다. 그렇게 죽지만 않기를 빌었다. 우아하게가 아니라, 벌벌 떨면서.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나를 보고 웃는, 권총을 든 세 명의 얼굴을 보면서.
경찰이 말했다, 불운이라고.
이런 류의 사건은 캠브릿지에서는 드문 일이라고 했다. 나는 늘 이곳이 주는 안전한 느낌을 좋아했었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나는 운이 없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행인이 많은 학교 앞 거리의 공중화장실에서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어떤 생면부지의 술 취한 남자에게 몇 분동안 두들겨맞은 적이 있다. 혹은 좀 가벼운 버전으로는, 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아무 이유 없이 건물 옥상에서 누군가 생각 없이 던진 컵라면 국물을 뒤집어쓴다거나 하는 일들. 여기 다 적을 수가 없는, 그런 기이하고 괴로운 불운들.
기억이란 참으로 얼마나 기막히게 불완전한 것인지.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던 그 순간의 일들이 아주 느린 동영상처럼 천천히 차례로 수십 번 재생되는데, 신기하게도 정작 그들에 관해서는, 인종과 성별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 머리 모양도, 키도, 입고 있던 옷도, 신발도, 옷의 색도, 모자를 썼는지도. 경찰이 묻는 상세한 질문들에 나는 하나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선명한 것은 오직 그 손에 들려있던 총, 총.
십대 후반으로 보이던 흑인 아이 세 명이 가진 그 총은, 진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경찰서에서 용의자를 찾아내기 위해 보여준 수백 장의 사진들에서, 비슷한 또래의 흑인 아이들은 독기를 품은 눈으로,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으로, 혹은 그저 멍한 시선으로 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장 한 장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사진에 찍혀, 또 어쩌다 이렇게 내 앞에 놓여지게 된 그 젊은 인생들을 헤아려보면서. 나에게 벌어진 일들, 또 그보다 먼저 그 아이들에게 벌어져왔을 일들을 가늠하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또 애쓰면서.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얼마나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인가.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보다, 그 아이들에 대해서, 혹은 그 아이들과 단지 비슷한 색의 피부를 가졌을 뿐인 사람들에 대해서, 그 모두와 내가 동시에 속해있는 세계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스스로를 깨달을 즈음에는, 나의 사고가 얼마나 나의 감정을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보았다.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가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트라우마'. 나는 어떤 단어나 개념이 유행할 때면 왠지 그 유행에 냉소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트라우마가 한참 유행하면서, 술 대결에서 '진' 것을 트라우마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보고 나서는, 저 단어는 왠만하면 쓰지 말아야겠군,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난 얼마 동안, 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더러 '너에게 트라우마가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괜찮을 것이다. 언제나 나는 여러 겹이다.
여러 겹의 다른 내가, 겁에 질린 나를 용케 잘 숨겨둘 것이다. 나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