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탕티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에코echo
2008. 9. 28. 16:42
소파에 기대어 TV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문득 잠이 깨어보니
케이블에서 이 영화를 하고 있었다, 이터널 선샤인. 예기치 않은,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 사람
처럼 이 아름다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차라리 지워지길 바라는 기억들.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의 지워지는 기억들은, 말소시키기 위해
호출해내는 그 순간 순간들이 너무 찬란하고 투명해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사랑하고 이별해본
사람들이라면, 차라리 지워지길 바라면서도 결코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과거의 순간들에 대
한 이 바보 같고 모순적인 감정의 극단들을 이해할테지. 그리하여 슬며시 웃음을 머금으면서,
움켜쥐고 싶지만 부서지고 마는, 그 눈부신, 사라지는 순간들의 아름다움을 그저 지켜볼테지.
하지만 이 사랑얘기를, 그저 사랑얘기가 아니라고 처음 영화를 봤을 때부터 혼자 우기곤 했었다.
"가장 부끄러운 기억 속으로 도망치자, 지워지지 않게." 이렇게 속삭이던 클레멘타인과 함께 돌
아간 유년의 시절에 조엘은 친구들의 놀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다닥거리는 새의 몸을 망치로
내리친다. 한참을 망설이다 몇번이고 망치질하는 조엘.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에 흐르기
시작하는 음악. "너무 부끄러워," 조엘의 참담한 독백에 "괜찮아, 너는 단지 어린아이일 뿐이잖아"
라고 등을 토닥여주는 클레멘타인의 위로. 아, 부끄러운 순간들과 차마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들에
대한 짤막하고 다정한 이 속삭임이 너무 애틋해서 나는 또 바로 그 장면에서 눈물흘리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다 결국엔 얼마나 경멸하고 조소하고 지겨워하고 견딜 수 없어하게 되었는
지를 알게 된 후, 그때도 이 사랑스러운 여자와 남자는 말한다. 괜찮다고. 사랑하다 증오하게 되고,
비난하고 저주하게 되어도, 종내 서로를 귀찮아하게 되어도, 그래도 괜찮다고.
이 짧고 다정하고 단순한 해법이 얼마나 위대한 위로를 주는지. 우리는 그저 놀림받지 않기 위해
새의 몸을 망치로 내려치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약한 존재들일 뿐이라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랑해도 언젠가 다시 서로를 지겨워하게 되리라고, 하지만 역시 지금의 이 순간들이 이렇게 찬란
하게 빛나고 있다고, 그러니 그냥 괜찮다고. 우리는 그렇게 결점 투성이의 허약한 존재들일 뿐이지
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괜찮다고.
찰스강으로 데려가달라고 속삭이던 클레멘타인, 그리하여 다시 얼어붙은 찰스강 위에 드러누운 조엘과
클레멘타인. 저 얼어붙은 강이 바로 찰스강인 것을 깨달았던 때, 그때 내가 얼마나 이 도시에 온 것을 행
복해했는지 모른다. 악명높은 겨울날씨에 대한 경고에도, 얼어붙은 찰스강에 대한 기대로 내가 얼마나
설레어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알렉산더 포프를 흉내내어 다시 한번 되묻는다: 잊혀진 세상에 의해 잊혀져가는 세상,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 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들. 이 얼마나 행복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