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echo 2008. 9. 16. 13:36

지젝 강연에 다녀왔다. 그의 강연은 뭐랄까, 한편의 공연 같았다. 처음에는 너무 제스츄어가 많고 코를 자주 만지작거려서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거침없는 화법이나 특유의 농담까지, 엔터테이닝의 요소들로 가득했다. 게다가 한편의 연극과도 같이 클라이막스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해서, 클라이막스다, 싶은 순간 실제로 객석에서--강연 도중에--박수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강연 중간쯤 그는 "유기농 음식(organic food)"이야말로 이 시대 이데올로기가 도달한 지점이라고 외쳤다. 객석에서 또 한 차례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나는 웃음은커녕 소름이 끼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타벅스를 안 마시고 유기농 음식을 먹으면서, 그것을 이 세계에 대한 의미 있는 실천이라고들 여기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이 시대 이데올로기가 도달한 지점이라고, 아,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경악스러웠다.

이곳이 훨씬 더 인문학적이다, 라는 생각이 이유 없이 들면서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는, 제국의 도시에 산다는 게 가지는 매력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지젝이 오고,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되었지만, 그래도 이 환영과 갈채 역시 매우 로컬한 방식이다. 학교 앞 서점이 매주 두세차례 주최하는 강연이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열리고, 그곳에 검은 색 티셔츠 차림의 지젝이 와서 떠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대강당에서 열리는 강연이라면 분명 가지 않았을 터이다.

아무튼 덕분에 난생 처음 싸인이라는 것을 받아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차례를 기다려 싸인을 받는데, 지젝이 나에게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를 묻더니, 내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자기가 서울에 방문했던 경험에 대해서 중얼거렸다. 그, 지하에 있는 서점, 열라 크더라... 뭐 이런 종류. 나도 웃으면서 맞다, 거기 크다... 뭐 이런 반응을 보였더니 또 한참 나한테 무슨 한국 감독에 대해서 물었다. 또 박찬욱인가 싶어(한국 얘기하면 박찬욱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귀기울였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 웃으며 인사하고 나왔다.


이번 주가 개강이어서 이번 학기에 듣기로 한 정치학과 수업을 기다리는 중이다. 한 학기 수업을 개관하는 첫 시간 용으로 교수가 syllabus에 적어놓은 reading이 흥미롭게도 "사회학적 상상력(sociological imagination)"이다. 덕분에 오늘 낮에 그 책을 빌려 한적한 신학대학 캠퍼스에 앉아서 읽다 왔는데, 참 감회가 새롭고 재미있었다. 얼마 전 헌책방에서 그 책을 분명히 보았었는데, 그때 한권 사둘 걸 그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젊은 사회과학자들에게 던지는 Mills의 조언들이, 좀 농담을 섞어 과장되게 말하자면,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나중에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 이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안타깝게도 국역본의 번역자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아무튼 참 미덕이 많은 책이다. 특별히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참으로 고전적이면서도 실용적인 Mills의 조언은 이것이다--사회과학자는 일기를 써야 한다는 것.

그렇잖아도 일기를 쓰겠다고 노트까지 사둔 참이었었다. 내친 김에, 연구소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노트를 집에 가져왔다. 이제 종이 위에, 볼펜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