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의도시

crimson corner 와 the coop

에코echo 2008. 9. 4. 11:19


crimson corner는 harvard square 코너에 자리잡은 잡화점이다.

온갖 종류의 신문과 잡지들을 가판에 내어놓고, 가게 안에 담배나 군것질거리, harvard 티셔츠 등을
대강 진열해서 판매한다. 별 특색 없는 잡화점처럼 보이지만--그리고 그게 사실이지만--196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45년이 넘은 가게다. 게이들을 위한 여행가이드에 보면, LGBT 신문이나 잡지를
찾으려면 이곳에 가라고 적혀있다.

내가 crimson corner에 가는 이유는 전화카드를 사기 위해서다. 처음엔 일부러 몇 군데 다른 곳에서
사서 가격을 비교해봤는데, 시간 당 가장 값이 싼 전화카드를 이곳에서 판다. 사실은 전화카드의 값이
싼 것 말고도 이 가게에 대한 재미있는 기억이 있다.

crimson corner에 들어가면 필시 가게 주인일 듯한 백발의 아저씨가 어정쩡하게 서있다. 처음 그
아저씨에게 전화카드를 사던 날, 전화카드를 달라고 했더니 어디에 걸 거냐고 물었다. 참 생뚱맞은
질문이어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한국이라고 대답했더니, 아저씨가 이렇게 되묻는 것이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순간적으로 얼마나 깔깔 웃었던지, 아마 캠브릿지에 와서 그때가 가장 크게 웃음을 터뜨린 순간이었을
것이다. 무표정한데다 고집도 있어보이는 아저씨가 따라서 낄낄낄 웃더니, 자기 친구가 부산에 산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다음부터 crimson corner에 가서 전화카드를 살 때마다 웃게 된다.

crimson corner 바로 옆에는 하버드대학의 '생협'이라고 할 수 있는 the coop의 서점 입구가 있다.
1882년에 하버드대학의 대학생들이 이 생협을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90년대 중반 한국의 대학가에서
시도되던 학생들의 생협운동이 떠올랐다. 공부 잘하는 백인 모범생들의 특징 없는 도시일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했었던 cambridge가 놀랄 만큼 리버럴한 기운을 갖고 있는 게 다 그런 리니지 안에 있어서일
것이다.

사진으로는 입구가 작아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척 큰 서점이다.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까지 있고, 2층에는
카페도 있어서 커피와 식사를 모두 제공한다. 서점 안에는 의자는 물론 도서관처럼 테이블들도 놓여있어서,
죽치고 앉아서 책읽는 사람들이나 어학원 숙제를 하는 듯한 한국인 어학연수생들도 제법 눈에 띤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던 어느 날엔가 나도 3층 바닥에 앉아 가방에 있던 책을 꺼내 한참동안 읽은 적이 있다.

생협의 매장은 여기만이 아니다. 1916년에 MIT가 보스톤에서 캠브릿지로 옮겨오면서 MIT도 이 생협에
합류했다. 통틀자면 예닐곱 개의 매장이 있는 것 같은데, MIT의 가장 큰 매장은 지나가면서 한번 본 일이
있다. harvard square의 이 서점 옆 건물에는 생활용품, 옷, 학용품, 텍스트북 같은 것을 파는 3층짜리의
매장이 있고, 두 매장은 구름다리 같은 통로로 3층끼리 연결된다.

cambridge에 도착하자마자, harvard square에서 단박에 눈에 띄는 이 the coop 매장들을 들러보고는
금세 나도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참 자주 들락거렸다. 불과 한달이 지났을 뿐이지만, 요즘은 좀처럼
가게 되질 않는다. 매력적인 서점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the coop에 가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harvard square 주변을 서성이다가 화장실에 갈 일이 생길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