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은주

에코echo 2006. 11. 10. 03:22

많은 사람들이,
왜 그 나이에... 라고 말했다.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런 말들을
무심결에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그 나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라고.

칼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날들.
한끝 차이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날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그렇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은주야, 이은주가 죽었대.
몇 글자 되지 않는 문자메세지를 읽자
유재하와 김현식, 김광석, 그리고 장국영의 죽음,
정은임의 죽음, 섬 언니의 죽음,
크레인 위에 올라갔던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큰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나는 무엇에 더 슬퍼하거나 혹은 더 충격받는 것일까를 생각하다
바보같은 짓이라 여겨 그만두었다.

펠리컨 브리프에서 나이든 남자는
그의 연인인 젊은 여자에게 말했다.
<네가 무사히 서른 살이 되기를 바래.>
언젠가 그 대사를 상기시켜주었던 사람은
형이 죽고 누나가 죽고 또 아버지가 위독하던 시절에
이메일에 이렇게 썼었다.

<옛 희랍인들은 마음이 아픈 것을
일종의 육체적 통증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 말을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문득 그렇다면 어떻게 치료했을까 하고
궁금해하던 기억이 또한 납니다.>


나는 무사히 서른 살을 넘겼다.
어떤 사람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다.
칼 끝에 선 것만 같던 날들이 지나고
이제 나는 통증을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그 모든 것들과 결별하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인생의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대도
그 아래는 끝이 아닐 거라고,
비오는 봄날 갑자기 우산 속으로 뛰어든 여자가
언젠가 말했었다.
죽고 다시 태어나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왔지>라고 말하던 그 여자에게
남자는 말했다.
<아니야, 지금이라도 와줘서 고마워>.

내가 라디오 피디였다면
추모곡으로 쇼스타코비치를 틀었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춤곡에 맞춰 왈츠를 추던 그 여자,
그런데 정말, 그 아래는 끝이 아닐까.


2005.2.24.


Moscow Chamber Orchestra

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Jazz Suite No.2, VI.Waltz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