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echo 2006. 3. 31. 17:17

얼마 전부터 동시에 세 가지의 고정적인 일을 하고 있다. 그 세 가지의 일들이 지난주 순차적으로 한 마디씩을 짓고 난 후, 피로가 한데 몰려 오랜만에 한참을 잤다. 새벽 세시가 넘도록 관성 때문에 잠이 들지 않더니, 자는 동안에도 여러번 꿈을 꾸었다.

책으로 펴내도 좋을 만큼의 편지를 주고 받았었던, 그러나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그가 있었다. 선한 눈과 강인한 입술을 가진, 램브란트를 좋아하는 화가지망생이었던 그는 오래 공장에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꿈 속에서 그와 있었던 다정한 풍경이, 얼핏 잠이 깬 후에도 계속 나를 휘감았다. 연애를 한 적 없고 연애 같은 것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인데도 이렇게 그립다. 그를 더 그리워하기 위해 떠지지 않는 눈을 그대로 두었다.

책이 나올 때마다 말 없이 한권씩을 주고 가던 선배도 있었다. 그 선배가 장문의 편지를 전했던 것이 그러니까 꼭 십년 전이다. 좀 더 강인한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훨씬 편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유약함이 언제나 불편했지만, 그가 유약하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그 십년동안 그렇게 변함없이 짧은 메모 적힌 신간을 별 말 없이 건네주곤 했을리 없다. 그 십년동안 나는 두번쯤의 연애를 시작하고 마쳤으며, 그 다음 시작한 연애를 아직 끝내지 않았다. 이연애를 시작한 후로 그 선배와는 연락이 끊겼다. 꿈에서 만난 그 선배가 반가웠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탄흔처럼 강한 인상을 남기던 그도 있었다. 항상 웃는 얼굴에 2인칭을 늘 "자기"로 대신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주 무서웠다. 홀어머니와 둘이서 가난하게 살아가면서도 어디에서도 무언가에 찌든 모습을 읽을 수 없었다. 술에 자주 취했고, 한번은 오래 연애한 여자의 결혼식 얘기를 취기를 빙자해서 꺼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만면에 웃음은 여전했다. "갔어요?" 물으니 "나는 자기통제가 아주 강한 사람인데, 안갔어. 자신이 없어서."라고 또 웃으며 말했다. 그와 나눈 대화는 모두합해야 몇 시간이 되지 않겠으나 그는 이렇게 난데없이 내 꿈에 나타난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죽고 동생은 어려서 뇌를 다쳤던,나보다는 훨씬 강한중학교 시절 친구도 있었다. 결혼해서 얼마 전 아이를 낳은 그애가 한참을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정주의 시처럼, "괜찮다, 괜찮다", 이렇게 중얼거려주었다. 그러자 그 애가 울음을 그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 마음 속에는 현재의 그애가 아니라 열다섯살때의 그애가 사나보다.

이런 수선스런 꿈을 꾸고 난 후,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어 침대맡에 누워서 노트북을 켜들고는, 엎드려서 오래도록 김훈의 인터뷰를 읽었다. 왜 하필 김훈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왠지 꼭 김훈이어야 한다는 억지도 있었다. 눈물이 나서 한참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종자가 달라서 힘이 드는 그가 슬픈 게 아니다.

소설을 아주 남성적인 언어로 쓰고 싶단 생각을 했다. 사실 이건 아주 오래된 생각이다. 그리고 논문은 아주 여성적인 언어로 쓰고 싶다. 그렇지만 이 생각은 곧 바뀔지 모른다. 날씨가 좋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아직 한 걸음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생각들을 접고 이제 밖으로 걸음을 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