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20
과거에 존재했던 누군가로부터, "너는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언급을 듣고 나면,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해지기 일쑤다. 게다가 나는 이런 케이스에서 매우 안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대학 2학년때 잠시 친했던 아이 하나가, 필경 자신의 자아를 구성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했을 어떤 대립물로 나를 의식하면서부터는, 나에 대해 거의 날조에 가까운 재현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대꾸하지 않았었는데, 작년이던가, 우연히 발견한 나에 대한 글을 읽고는 비분에 차서 토악질 하듯 반응을 뱉어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아이는 나에 대한 단정을 날조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지금껏 믿고 있을지 모른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성장기의 대립물 같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유쾌한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꽤 친했던 친구 하나와 오랜만에 연락이 되었다. 나는 의외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에너지를 쏟는 타입이 아니라서, 매우 친했던 관계인데도 지속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찌어찌하여 나를 찾아낸 그 친구가 메신저에 나를 등록한 이후로, 몇번의 대화를 나누었다. 이문열에 심취해있었던, 만화를 잘 그리고 컴퓨터를 잘 다루던 그 친구는, 지금 모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또메신저에서그의 논문을 주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간간히 나에게 "친절하다"거나 "우아하다"는 표현을 쓰기에 화들짝 놀라는 제스츄어를 취하니, 이 친구 너무 진지하게 반응한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균열이 조금씩 감지되고, 그가 기억하고 있는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 혹은 실제 과거의 나와 어떻게 같고 다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십대 시절부터 총명하고 잡기가 많던 그 친구가 난데 없이 태어난 장소와 시를 묻더니, 점성술로 본 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나는 머리가 매우 좋고 세상의 추악한 것을 증오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음이 약하다. 균형잡는 것을 매우 잘하고,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머리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고, 공부는 숙명이다. 철학적인 것을 미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서, 미학적인 성향을 띤다. 이번 생의 목적은철학적인 의미를 깨닫는 것. 그런데 생이 너무 많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호기심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사주든 점성술이든, 아무튼 중요한 것은 상호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나에 대한 점성술의 단언에 아무리 나쁜 얘기가 하나 없다 해도, 글자 하나하나가 예리한 칼날로 후두둑 떨어지며 관자놀이를 스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 대해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데, 그 친구는 나에 대해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호의와 관심과 정성으로 이야기해주는 그 친구에게 미안할 만큼, 나는 그 점성술 결과가 부디 그치기만을 빌었다. 중간중간 기원하는 심정으로 애써뜨악한 반응을 나타내니, 이 친구는 답한다. 왜, 내가 기억하는 너와 너무나 똑같아.
나의 자아라는 것도 지긋지긋하지만, 타인이 기억하고 있는 나의 자아도 버겁다. 정확히 열여섯살쯤부터 편지를 한통도 쓰지 않았었는데, 나의 흔적이 타인에게 물질로 남아있는 게 싫어서였다. (덕분에 그 절실했던 사람들이 군인이 되어있을 때조차 단 한통의 편지도 쓰지 않았다.) 이런 강박도 때로 지겹고 지루하지만, 자아라는 관념에 나 스스로가 사로잡혀 있을수록, 그 관념을 육화시켜 탄알 한방으로 날려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아주 작은 탄알 하나가 소용돌이치면서 그 육화된 관념을 묵사발낼 때, 난 얼마나 지극한 자유를 느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