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echo 2006. 3. 19. 05:00

흙탕물에서 가라앉아버린, 침전물 같은 기분이 계속되었다. 아, 이건 우울 같은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상태다. 아무튼이윽고 밤이 되었다. 문득 오늘 낮에 본 어느 TV프로그램이 생각난다.

그렇고 그런 사연 끝에 딸을 낳은 77년 이후, 한번도 그 딸을 보지 못한 엄마가 결국 그 아이를 찾게 되었다. 스웨덴에 입양간 딸은, 한국 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이방인이 되어 한국 땅을 밟았다. 백인 남자와 결혼해서 혼혈아를 낳은 그 딸은엄마가 찾는다는 소식에도 울지 않았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녀는 울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덤덤하게 말했다. 운이 좋게도 아주 좋은 가정에 입양되었다고. 양부모 모두 아주 좋은 분들이었고,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고. 그리고 친엄마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고. 혹시라도 죄책감 같은 것 가지지 말라고.

차라리 미워하고 원망을 했어야, 친엄마에게도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치유가 일어났을 것이다. 무언가 격정적인 감정의 발산을 준비하고 있던 친엄마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으리라 상상했던 딸은 아무 미움도 원망도 없이 백인 가정의 입양아로 만족스럽게 자라났다. 그렇다고 딸의 불행을 원했던 것은 아니련만.

막상 딸을 만나서도 역시 별 표정의 변화를일으킬 수 없었던 엄마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린다. 늙고 초라한 그녀는, 꼭 닮은 이목구비를 가진 딸의 세련됨과 조화되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가 어느 누구에게 결핍이나 부재를 통한존재감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 그 엄마는 방송이 끝난 후에도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시간들을 통과해야만 할까.

오마이뉴스 오연호의 파워인터뷰도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았다. 청산유수의 입담에 자신만만함을 갖춘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장금이에게 두려움을 가르치던 드라마 속 선생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렇다고 오연호에게 두려움을 요구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나는 어떤 쪽 사람이 되어야 할까, 잠시 생각해보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를 지속적인 되어감(becoming)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폴로니안의 특징이라고 했겠다. 결국 이게 자기충족적 예언 같은 꼴이 되는 건 싫지만, 아무튼 내가 필경 그런 태세임엔 분명한 듯. 아무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이 두려움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