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탕티즘

살인의 추억

에코echo 2005. 7. 29. 11:49



나는 아주 게으른 영화광이다.
살인의 추억이 처음 개봉을 앞두고 있을 때부터
그리고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이 영화가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단 한줄의 비평도 의식적으로 읽지 않았고
티브이 영화프로에서 이 영화가 나오면
일부러 채널을 돌렸다,
오직 내 눈으로만 영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살인의 추억이 극장가의 간판에서 내려오고 나서도
반년이 족히 지난 몇 주 전이니,
참 게으르고 게으른 관객이구나.

올드보이의 감흥에 며칠을 취해있으면서 나는
살인의 추억을 보지 않고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올드보이를 보는 내내 나는
그 영화와 살인의 추억이 마치
쌍생아와도 같은 관계일 거란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한 몸 속에 들어있는 쌍생아라는
기묘하고도 평범한 생각을 하곤 하는데
그 영화들에도 왠지 그런 식의 짝짓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하나는 벌거벗은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다른 하나는 무수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올드보이가 삶도 사회도 아닌 오로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응시라면
살인의 추억은 정확히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인, 사회적 관계들 속의 인간군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간들의 삶에 대해서, 그것을 낳는 그 사회에 대해서.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아파
가슴 한쪽을 손으로 꾸욱 누르며 숨죽여 울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겠지만 그저 태어날 때부터
그 속에 내던지어져 버렸던,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그 얽히고 설킨 사회적 관계들.
이 관계들과, 그 안의 인간들에 대한 봉준호의 시선은
너무나 진지하고 치밀해서
그 안에 담긴 그 깊은 연민 자체에 소스라칠 정도이다.
하지만 그것이 종종 너무나 해학적인 스타일 속에 녹아있으니
이 영화가 그의 두번째 장편영화라는 사실에 오직 탄복할 뿐.

아주 사소하게 지나쳐가는 장면들에서조차
그 연민과 해학의 긴장은 좀처럼 늦춰지지 않는다.
시위현장에서 대학생을 개처럼 두들겨패고
취조실에서 덧버선 신은 발로 사람을 짓이기던 형사는
"형은 2년제라도 나왔으니 알 거 아니예요...
씨발 4년제, 나는 고등학교만 4년 다녔는데"라고 말하는,
가족이라고는 없이 자라난 인간이다.
말을 잘 못하고 얼굴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어른이자 아이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아궁이에 던져버린 아들이고,
다른 용의자들을 손찌검과 욕설로 대하던 형사는
양복에 안경쓴 용의자에게
"부녀자 관련 사건인만큼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악하지 않다.
그들은 모두 제각기 그물처럼 얽혀있는 사회적 관계들에
그 자아를 압도당해버렸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은 서로를, 서로의 자아를
그 자체로 마주하지 못한다.
그들은 형사와 범죄용의자이면서 고문관과 피해자이고
시위대학생과 폭력경찰이면서 또 고학력자와 주변인들이다.
서울형사와 시골형사이면서 타지인과 토박이이다.
그들이 서로를 이 관계에서 벗어나 바라보았을 때
잔인한 살인(용의)자는 오직
타지에서 흘러들어온, 가족 없는 외로운 젊은 노동자가 된다.
그러니 분노로 이글거리던 시골형사의 눈이
그의 눈을 처음으로 마주보았을 때
"...씨발 모르겠다" 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분노의 정점에서 견딜 수 없는 연민을 느끼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이야말로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저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이구나, 를
느끼는 순간이 아닌가.


이 영화가 훌륭한 것은
이 모든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그것을 지식인의 시선 안에 가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은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식인들의 자기성찰과 자기도취를 동시에 자극하는
영원한 이중적 테마이다.
그러나 봉준호는, 이를테면 박광수를,
훌쩍, 너무나 기막히게 뛰어넘었다.
지식인의 시선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박광수는
심지어 전태일을 이야기할 때조차 지식인의 눈과 입을 통해 말한다.
(문성근이 동거하는 여공에게 "네가 전태일이야"라고 말할 때,
나는 정말이지 스크린에서 눈을 돌리고만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봉준호는
홍상수에게서 지겹게 나타나는 그 냉소에 빠져있지도 않다.
안경쓴 양복차림의 용의자가
"시골 여성 답지 않게 세련되다고 느꼈습니다"라고 말할 때,
흰 가운을 입은 국과수의 박사가
"미국에서 서류 오기만 기다리면 됩니다"라고 말할 때,
그들에 대한 시선에는 풍자가 섞여있기는 하나
겉멋은 있을지언정 무기력하고 간편할 뿐인 냉소는 담겨있지 않다.
작가로서의 가장 위대한 덕목은 무엇일까.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것은,
인간에 대한 깊고도 깊은 연민이다.
연민에 뿌리박지 않은 냉소는
그역시 오직 지식인 취향일 뿐인 겉멋에 불과하다.

또한 살인의 추억이 가지는 탁월함 중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담는 방식에 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감독인 이창동은
한 인간을 순진한 젊은이에서 광주의 진압군으로,
그리고 또 망가진 어느 사십대로 만들어버리는 사회를 말하기 위해
한 젊은이가 광주의 진압군이 되고 또 망가져가는
<바로 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
그의 영화들은 이야기의 소재 자체에서 권위를 찾으려 한다.
그리고 진부하다.
하지만 봉준호는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소재 속에 담아낸다.
그 소재 속에서 수많은 인간군상을 담아내고,
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을 통해 말한다.
이것은 박찬욱이 복수극이나 근친상간을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소설에서는 이제 사라져가는 <이야기꾼>들, 즉
가공의 이야기, 가공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해낼 줄 아는
작가적 역량을 탁월하게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진부하지 않다.
또한 이야기의 소재 속에서 어떤 권위를 가장하지도 않는다.


살인의 추억을 본 직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침대에 누워서는
한참 잠을 뒤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역은
<예술>과 <정치>이다.
그것이 지금 실제로 어떠할 지언정,
진정으로 그것은 사실이다.
그 다음은 <종교>쯤이 되겠지.
그렇다면 공부는 어디쯤에 위치할까.
그리고 아주 우울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잘 쓰여진 사회학 논문 한편, 혹은 책 한권이
과연 이 영화 한편 만큼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심지어 서른 다섯살의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공부란 참 생산성이 낮은 영역이구나.

2004.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