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며칠 전, TV 채널을 돌리다 문득
내가 한동안 몸서리치며 끔찍해했던 영화
오아시스를 다시 보았다.
다시 보아도 영화는 여전히 끔찍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설경구의 연기는 다시 보아도 역시
역대 한국영화 중 최고였다.
이전에 오아시스를 본 일 없다는 노군이
설경구의 연기에 감탄하며 영화를 보는 동안
어느덧 영화는 종두가 공주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흘러가고,
다시 찾아간 종두가 공주를 강간하기 직전
나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일어서며 말했다.
<끔찍해서 보기 싫어.>
오아시스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마도,
<끔찍하다>는 말은 그 강간장면에 관한 걸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정작 끔찍한 것은
강간장면 바로 다음부터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말없이 영화를 보던 노군은,
강간당해 실신한 뇌성마비 공주가
다음날 화장대 앞에 앉아 힘겹게 립스틱을 바르는 장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며 탄식처럼 혼잣말을 뱉었다,
<뭐야... 화장... 하는 거야?...>
뇌성마비 여성 장애인의 여성성, 여성적 정체성,
혹은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이 영화에서, 이처럼 완벽하게 조롱당했다.
나는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이렇게 버젓이 일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강간당한 여자에게도,
손과 발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여자에게도,
여자로서의 성성이 완전히 무시되어버린 그 여자에게도,
실은 여성성과 성욕이 존재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의
이처럼 기막히고 극적인 환기라니!
이창동의 영화는
갈수록 더 나빠진다.
그리고 그건 예상했던 대로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 대한 평은
갈수록 더 좋아진다.
그것도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영화잡지를 읽지 않은지 정말로 오래됐지만,
나는 평단의 그 단순성이 참으로 싫다.
<장애인과 밑바닥 인생의 사랑>이라니,
이건 처음부터 작품성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소재다.
영화제 작품상 후보작 자리도 먹고 들어가는 소재다.
이런 식의 <모범생> 영화에 대한
안일한 채점자 같은 그 단순성이 싫다.
이건 마찬가지로 뒤집어 보면
김기덕의 영화가 왜 그렇게
지독한 평단의 질시에 시달려야 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김기덕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의 영화는 애초부터 <문제아> 영화다.
안일한 채점자들은 문제아의 답안을 싫어한다.
그리고 나는 역시 그 단순성이 싫다.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고
그 여자가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따위의 플롯은
<오아시스>에서나 <나쁜 남자>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단순하고 안일한 평단은
한 영화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인 극찬을
한 영화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낙인 찍기를 행한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지 않는 것이,
<나쁜 남자>를 비난하던 평단의 논자들이
어떻게 그보다 훨씬 더 잔혹한 <오아시스>의 끔찍함에 대해
그토록 침묵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심지어 심심치 않게 페미니즘을 운운하던 조선희는
종두가 공주를 강간하던 장면은
너무나 확고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며
아무도 청하지 않은 이창동에 대한 변호와 방어를 자처하고 나섰다.
자신이 이창동에 대한 맹렬한 지지자임을 자랑스럽게 부연하면서.
나는 도무지 이런 일들이 어떻게 벌어지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김기덕은,
강간당한 여자의 여성적 정체성과 성욕을
강간 장면 바로 다음 씬에서 새삼스럽게 환기시키는 식의
그런 야비한 내적 정당화의 장치는 쓰지 않는단 말이다.
이게 바로 모범생과 문제아의 차이다.
나는 문제아를 무조건 좋아하지도 않지만
모범생을 칭찬하는 일에는 <인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여, 나는 체질적으로 모범생이 싫다.
이창동은 조선희의 호들갑스러운 찬사에
자신의 영화는 결국 모범생 영화일 뿐이라는 식의 언급을 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한계를 적어도 모르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이것조차 철저하게 모범생스럽다.
(그에 비하면 박광수는 차라리 솔직하고 순진하다.
박광수는 언제나 영화 전면에 자기를 드러내고
지식인 자아를 어쩌지 못해 괴로워한다.
반면에 홍상수는 늘 모범생과 문제아 사이에 서서 즐거워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마치 냉소적이고 우울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즐 모범생과 문제아 사이에 서서
마치 자기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듯
양편을 조롱하며 즐거워하는 홍상수의 시선을 느낄 수가 있다.)
장애인과 밑바닥 인생의 사랑은
누구에게든 감동을 주지 않을 리 없고
누군들 그 사랑에 눈물흘리지 않을 리 없다.
나 역시 예전에 영화관에서 그들의 사랑에 눈물 흘렸다.
그리고 내가 흘리는 그 눈물에 대해 매우 불쾌했었다.
몇 년이 지나 TV로 다시 보게 된 그 영화를
채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리모콘으로 눌러 끄며 생각했다.
김기덕 영화의 한기(조재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간단히 동정하거나 연민할 수 없다.
하지만 이창동 영화의 종두(설경구)는
누구나 간단히 동정하거나 연민해버린다.
이게 이창동 영화의 해악이다.
김기덕의 문제아 영화는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악의적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 의도성을 감안하지 않고 단순히 비난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창동의 모범생 영화는
보는 사람을 모두 편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보다 지능적이다.
관객들은 모두 손쉽게 모범생이 되어
현실에서는 눈 마주치는 것조차 두렵거나 불쾌할
종두라는 인물에게조차 인간애적인 연민을 간단히 느껴버린다.
아주 오래 지난 영화지만
TV로 우연히 마주친 이 영화의 몇 장면으로
당시의 복잡했던 심경과 끔찍한 기분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내가 읽은 것 중, 정성일의 글만이 유일하게
오아시스를 끔찍한 영화라고 평했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평단이라고 부르는 그룹들은
너무나 편향적이다.
세계와 사물과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목소리는
여전히 너무나 지나치게
과잉대표 혹은 과소대표되어 있다는 것이다.
200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