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이
술을 마셨을 때나 멀쩡할 때나
어디선가 누군가와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는 귀가길에는
늘 똑같은 기분이다.
어렸을 적 읽은 동화책에서처럼
입에서 개구리와 뱀을 마구마구 쏟아낸 듯한 기분.
그래서 약간은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도 든다.
아무튼 말을 많이 하고 돌아오는 귀가길은
썩 유쾌하진 않다, 대개, 늘 그렇다.
오늘은 여기에 덧붙여 좀 색다른 사실을 깨달았는데,
언젠가부터 대화의 양과 관계의 깊이는 무관해지더라는 것이다.
오늘 낮엔 몇시간동안 누군가와 홍대 앞의 커피집에서 수다를 떨었으며
저녁엔 누군가가 자신의 개인적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한참동안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그들과 나 사이의 관계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변화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예전같으면
이 정도의 시간, 이 정도의 주제, 이 정도의 대화라면
뭔가 둘 사이의 친밀함에는 비약적인 발전이 있기 마련이고
둘 사이에서 뭔가 개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물꼬기 트이기 마련인데
언젠가부터는, 이런 식의 대화란 모두 파편적이다.
다음에 만나면 또 이런 대화를 나눌지도 모르지만
대화가 끝나면 다시 서로의 진짜 친밀함의 영역으로 헤어져 돌아선다.
이 차이는 뭘까?
문득.. 이것이 "나이가 든다"는 것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고
이런 식의 결론이 참 우습다고 느끼면서도
그것 말고는 딱히 설명할 길도 없어서,
그렇다면 역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군, 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참 편안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튼, 편안하면서 좀 이색적인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