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교에 빠져 있는,
불교의 경전 정의는 매우 모호하다.
불현량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경전의 텍스트에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도 다분히 불교적이다.
불교에는 정전canon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에는
주체가 없다.
우리가 이른바 전생-현생-내생으로 받아들이는
형이상학적 혹은 실체적 자아의 윤회는
불교가 태동하던 시기,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브라만교의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함께,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육체와 정신의 작용(오온, 色受想行識)은 끝나버린다.
윤회하는 것은 단지 세상에서 내가 쌓은 업karma일 뿐이다.
주체가 없는 윤회를 말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당시의 지배적 세계관인 윤회에 대한
일종의 반론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연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계,
죽음과 함께 소멸하는 존재들,
이처럼 명료한 종교와 철학을 어디서 더 찾을까.
타츠야군과 이야기하던 도중,
가장 진지한 기독교 신자이었던 순간에조차
내세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다는 걸 깨달은 나였다.
불교가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각이나 환기 자체가
나에겐 일종의 신성한 그 무엇이 되었다.
모든 종류의 실체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철학은 급진적이다.
이러한 사유가, 실체론으로 뒤덮인 인도땅에서 태동되었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한
어느 철학자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심지어 불교는
근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사유체계일지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불교와 연관시켜 논하는 페이퍼를 쓰기로
잠정적으로 결정.
이러한 사유가 나의 삶과 어떻게 연관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숙제.
어쩌면, 며칠 전 타츠야군과 나눈 대화처럼
오십줄에 나란히 출가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