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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던지기

20060312


안구건조증이 심해진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눈동자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눈동자가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어 눈꺼풀 바깥으로 눈동자가 튀어나오는 상상을 하다 집어치우곤 했다. 이상한 것은, 인공눈물이, 이사하면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통증이 도질 때마다 마약을 찾듯 눈물을 찾아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허사였다.
 
눈동자의 극심한 통증 때문에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 핑계로, 오후에 일을 마친 후로는 저녁 내내 빈둥거리며 소설책과 영화를 보며 지냈다. 처음 침대에 누워 소설책을 펼치면서, 눈동자의 통증 때문에 소설책을 읽는다는 것이 과연 그럴 듯한 얘긴지 잠시 궁금해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안구건조증 때문에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뻑뻑한 눈동자에 얼음찜질을 하며 읽기에 너무 적당할 만큼 단숨에 읽히는 글이었는데, 실은, 기대만큼 그렇게 처절하거나 고통스럽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 요조의 자기기술이 나 자신의 경우와 너무 흡사하다고 여겨졌는데, 근본적인 불화의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살꾼'으로 존재하는 그의 습성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겠더라는 것이다. 거부하거나 사양하는 것에 대한 공포, 공포를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태도, 역시 그마저도.
 
그리고 나서는 최선생이 추천한 영화 <21그램>을 보았다. <인간실격>에서, 죄의 반대말이 무엇이냐고 다자이 오사무는 물었었다. 여러 차례 죄를 짓고 더 이상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팔뚝에 십자가 문신을 새긴 남자가 우연한 자동차사고로 한 가족을 파괴시킨다. 그는 죄를 지었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죄가 아닌 그것이 그를 완전한 파멸로 이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이런 문제들, 즉 정치 혹은 사회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런 문제들이 살갗이 떨리도록 나를 뒤흔들었던 가장 원초적인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새삼스레 환기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생각이 가지를 뻗으면 모든 것이 괴로워진다.
 
모든 것은 한끝 차이다. 요조는 정신병원에 수감되었고,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번째 자살시도에 성공하여 죽었으며,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 내가 정신병원에 수감될 수도, 약물에 중독될 수도, 수차례의 자살시도 끝에 훨씬 전에 죽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숀 펜은 결국엔 죽었고, 베니치오 델 토로는 결국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여자는 또다른 아이를 낳게 되었다.
<21그램>도 역시 불교적인 영화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모두 그렇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있는 것이다.
구원은 존재하는가? 요조에게도 다자이 오사무에게도 숀 펜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아마 구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바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렬히 구원을 바랬으나 얻지 못했던 델 토로, 그의 비극성은 그래서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이다. 그것이 이 세계의 유일한 진리라는 요조의 마지막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