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며칠 전 빵과장미님 메일에 답장을 쓰면서, "블로그를 쓰면서부터 일기 쓰는 일이 줄어든다. 생각을 정리해서 쓰는 습관을 점점 망쳐가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그렇다. 자기가 써놓고, 그제서야 자기가 써놓은 걸 보고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2.
경찰서에서 증거수집용으로 가져갔던 증거품들을 며칠 전 찾아왔다. 지문이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여권을 되찾음으로써, 유일한 신분증을 다시 소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 먹으며 경찰서에 갔고, 그렇게 생각하며 경찰서를 나왔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몹시 현기증이 났다. 현기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버스를 기다리면서 깨달았다. 그 오후에 이혜경과 김애란이 오는 콜로키움에 갔다. 현기증에 시달리며, 이혜경이 직접 읽는 "피아간"의 몇 문단을 들었다. 눈물이, 발바닥부터 차올라서 목구멍 바로 아래에서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고 팔에 얼굴을 기댄 채 그 무겁고 잔인한 이야기를 들었다.
3.
어제는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2008년 대선에 관한 토론회에 갔었다. 물론 선거에도 관심이 있지만, 패널 중 한 사람이 테다 스카치폴이었고, 사회가 제니퍼 혹스차일드였다. 스카치폴의 발표를 들으면서, 문득, East Coast의 지식인들과 소수인종과 (고전적 의미에서의) 좌파와 동성애자와 육체노동자와 자유주의자들이 하나의 정당, 한 사람의 후보를 지지한다는 게 얼마나 기이하고 이상하고 놀랍고 신기한 일인지에 대해서 한참 생각했다. 이건 어떤 종류의 연대(solidarity)라기보다 너무 많은 coalition이다.
4.
지난 주였는지 지지난 주였는지, 마지막 대선후보 토론회를 보는데, 그냥 오바마의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이제 정말 흑인 대통령이 나오는구나. 내가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얼마나 더 복잡한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야했을까?
강도 당했던 날,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이런 일들이 한번 일어날 때마다 나와 같은 인종의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진저리치며 저주스런 연민을 느낄까. CNN에서, 멕케인을 붙잡고 "저는 정말 두려워요, 오바마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요" 라고 하소연하던 백인 할머니를 보면서, 저 공포, 무어라 이름 붙이기 힘든 저 끔찍하고 본능적인, 광기에 가까운 두려움이, 흑인들의 삶을 얼마나 보이지 않게 지배해왔을지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5.
김애란은 상상보다 뭐랄까, 반듯해보였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뭐랄까 좀 재치있고 톡톡 튀고 왠지 어딘가 귀엽게 당돌해보일 것 같은 깜찍한 인상보다는, 말 그대로 꽤, 반듯해보였다. 그리고 참 젊었다. 재치있고 깜찍하고 귀여우면서도 반듯한, 젊음. 다른 소설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고 생각했다.
엊그제 밤에는, 김애란 소설을 읽어보려고 빌려온 소설집을 침대맡에 가져와 자기 전 읽었다. 그 소설집에 박민규의 소설이 있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참 이상하게 슬픈 소설이었다. 이상하게. 책 표지를 덮은 후에도 가슴이 저렸다. 가난한 상고생이 알바를 하는데 엄마가 입원하고 아빠는 가출하는, 그런 얘기라고 하기엔, 참 이상하게 슬픈.
6.
다시는 소설책을 읽지 않겠다, 는 말도 안 되는 결심을 비장하게 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갔었는데, 어쩌다 십년이 흘렀고, 나는 이렇게 태평양을 건너와서는 외국의 도서관에서 한국소설을 빌려와 밤마다 읽고 있다.
인생이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