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사위던지기

20061022

창고 같은 베란다의 얇은 철판 지붕 위로, 빗방울이 마치총알소리 퍼붓듯 우두둑 우두둑 쏟아져내리고 있다. 텅빈 집에서 오랜만에 긴 휴식을 취한 하루였다. 휴식은 언제나 몸을 지치게 한다. 정신 없는 하루하루, 토요일의 부산행, 그리고 오늘. 내일 아침이면 또 부산스레 포천행을 준비하고 뛰어다녀야 할 터인데, 맥 없는 몸을 핑계로 시간을 천천히 죽이며 보냈다. 어제 집어든 오쿠다 히데오의 책을하나 읽었고, 포천행 준비로 수십통의 전화를 주고 받으며 메일을 쓰고 또 썼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오직 무위로 시간을 천천히 죽이며 보낸 하루로만 느껴진다.

저 빗소리 때문인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대낮에도 몸에 으스스 한기가 돌았다. 이따금 보일러를 돌리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차에 난방을 틀었다. 금세 발바닥에 온기가 느껴졌다. 보지도 않을 텔레비전을 켜고는 무신경하게 채널을 이리 저리 돌렸다. 그리고는 우연히 걸려든 아메리칸 아이돌을 틀어놓고는 오쿠다 히데오를 읽었던 것이다. 독설과 냉정함으로 악명 놓은 사이먼이 싫지 않아 중간 중간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았다. 합격과 탈락, 환희와 좌절. 최종 본선 후보를 뽑는 오디션을 보면서, 인생이 그런 식이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오쿠다 히데오를 이어 읽었다. 지로의 아버지 이치로 때문에 자꾸 누군가가 떠올랐다. 사이먼의 웃음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해야 할 일들은 많다. 바쁜 일상에 짓눌리는 타입도 아니다. 하나씩 목록에 체크표시를 하면서 지워나가는 동작만으로도, 무의미하고 단순하기에 무시할 수 없는 뿌듯한 성취감이 가볍게 나를 들뜨게 할 것이다.글을 쓰고 발표하고 다시 쓰고 또 어딘가에 게재하는 일들. 심각하지 않은스트레스는 카페인처럼 일상을 가볍게 각성시킬 것이고, 삶을 빛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바쁜 일상 속에서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 그런데, 너는 왜 이 삶을 택했니?

저 빗소리 때문이다. 오랜만에 찾아간 쏘냐의 블로그 때문이다. 그녀가, 같이 살고 싶은 사람 이름으로 영원히 화경이란 이름을 대겠다고 써서 질투가 난 까닭이다. 어느날 아침 출근하려고 일어나다 주저앉은 여자가, 이제 장기가 썩고 피부가 곪아간다고 하는 이야기 때문이다. 만 서른도 되지 않아 뇌경색으로 쓰러진 친구녀석 때문이다. 무슨 무슨 빨갱이 아들로 태어나 자라서는 저도 빨갱이로 살며 빨갱이 아들까지 길러낸, 결핵 걸려 지리산 들어간 어떤 남자 때문이다. 며칠 전에 꾸었던 절망적인 꿈 때문이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왠지 내 삶은 이미 반쯤은 실패한 것 같다. 나는 패배자인 것 같다. 그리고 담담하다.

페이퍼를 쓸 때면, 사물들과 사태들이 정말 꼭 이러한 것만은 아닌데, 글을 시작한 이상 어찌할 수 없어 사물들과 사태들의 복잡하고 끝 없는 변이와 변화의 연쇄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스스로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내가 패배자가 되는 한 순간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도 역시 매한가지로 패배자가 될 것이다. 게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게임 바깥이기는 하지만, 지금 쓰는 이 글도 그렇다. 그냥 조용히 오쿠다 히데오나 읽으며 혼자 집에 처박혀있던 하루. 방향 없는 글을 쓰는 일이 패배인 것처럼, 글을 쓰는 일은 애초에 모두 패배를 전제한다.유일한 차이는 이것이다. 그 패배가 괴로운가, 즐거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