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굳이
스트레스까지 받아야 할 필요는 없는데
그런데 왜 또 비디오 가게에서
홍상수 영화를 집어들었을까.
깐느의 영향인지
어쩌면 홍상수가 조금은 변했을 수
있다고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다.
한 편의 영화로 끝난 이야기를
주구장창 다른 영화들로
재탕 삼탕 하다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정말이지 인상적이었는데
그건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그 영화가 최고였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그 영화만 찍고
더는 찍지 말았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 이후의 영화는 모두가 똑같았다.
<오, 수정>까지만 찍고 그만두었다면
꽤 괜찮은 감독으로 기억되었을 텐데.
더 이상 홍상수가 영화를 만들지 않아도,
대학이나 영화판이나 대충 그러저러한 문화예술<계> 언저리는
쓰레기들로 넘쳐나고 있고 사람들은 대개 그것을 알고 있으며,
적당한 경멸과 적당한 냉소, 적당한 연민은
홍상수 없이도, 루틴하게 반복되고 있다.
다른 누구 아닌 네 자신, 나 자신이 그런 쓰레기다, 싶은
그런 적당한 자기혐오도 적잖은 사람들에게 훈련되어 있다.
홍상수는 이제 하나도 새롭지 않다.
더욱이, 자기혐오를 모르는 유형도 기만적이고 참기 어렵지만
홍상수 식의 자기혐오는 대개 자기방어적이고 폭력적이며
종종 해로운 자기애와 동전의 양면이지 않은가.
여기저기서 시시때때로
별 생각 없이도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남자들이나
별 생각 없이도 이 남자 저 남자와의 섹스에 응하는 여자들,
도무지 맥락이라고는 없이
<빨아줘>, <빨아드릴까요>를 속삭이는 사람들,
처음엔 신선했으나 이제는 뻔해진
건조한 섹스장면들,
<너무 빨리 끝났죠?>라는 말에
<항상 그런 거 아니예요?>라는 식의 대답,
그리고 담배를 피워무는 따위의 장면들,
여기서 술이 취해서 이 사람과 섹스하고
저기서 술이 취하면 저 사람과 섹스하고,
그래서 홍상수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해 꼭 그래야만 하나.
과연 <작가주의>라는 레떼르는 홍상수에게 합당한 것일까.
비디오를 보다, 최선생,
<츳... 현실이랑 점점 멀어져가는구나...>라고 중얼거리며
<처음엔 현실이랑 가까워서 주목받았는데...>라고 덧붙이다.
그냥 그 정도로 충분하다, 홍상수에 대한 평.
다만,
연기는 썩 뛰어나지 않아도 예전부터 마냥 좋아했던 유지태라는 인물이
왜 이런 영화를 위해 저렇게 살을 찌웠을까,
그게 안타까워 한참동안 주절주절.
딜레탕티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