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새해 결심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잠들지 못하고 있다.
꼭 조제 같다. 조제는 잠든 츠네오 옆에서 계속 중얼거리잖아.
그렇잖아도 잠들면서 창호가 말했다. <잘자, 조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 영화를 꼽겠다.
... 물론 눈물로 친다면 <스텔라>나 <파이란>만큼 울 수는 없지만
그 영화들보다는 백배쯤 슬픈 영화다.
너무 슬프면 많이 울 수가 없는 것이다.
... 만약 <인생은 아름다워>와 견주어야 한다면
나는 너무 괴로워서 슬퍼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당분간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영화로
기억하기로 결정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누군가 이 영화를 그냥 슬픈 사랑얘기라고 말한다면
아니라고 우기지 않고 그냥 웃겠다.
호랑이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그 무엇,
그리고 한번도 본 적 없는 물고기처럼
한없이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은 꿈,
그 모든 것이 뒤엉켜 있는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그것을
그냥 쉽게 사랑에 관한 얘기라고 얼버무려도 나쁘진 않지.
그런데 하필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던
사강의 <조제>라니.
이건 그냥 슬픈 사랑얘기라고 하기엔 좀 참혹하군.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혀있었던 조제는
물고기가 되어 푸른 바다로 헤엄쳐 흘러나와
결국은 조개처럼 혼자서 데굴데굴 바다 밑바닥을 굴러다니다
별로 슬픈 기색도 없이 물고기를 구워 생선요리를 만들어 버리고는
다시 쿵, 부엌 바닥으로 다이빙한다.
게다가 이별선물로 건네는 SM 킹이라니.
하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람이
그 하나 앞에서 그 절실함을
얼마나 바보같이 보여주고야 마는 건지
결국 절실함은 감추어지고 바보같은 짓만 남아서
수족관 앞에서 어이 없이 막무가내로 떼쓰던 조제,
이내 아무 생각도 없어보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네비게이션을 끄고,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하던, 착한, 불쌍한 조제.
당장 가버리라고 발악하듯 소리지르던 조제,
신발 신는 츠네오에게 정말 가냐고 소리지르던, 가엾은, 조제.
절실함은 감추어지고 바보같은 짓만 남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더 바보같아지는, 바보같은 조제.
나는 츠네오가 하루끼를 두들겨 팰 때부터
눈물 흘리기 시작했지만
그렇지만 츠네오에게 조제는
조제에게 있어서의 츠네오와는 달라,
하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바보 같은 짓을
하나를 잃어도 모든 것을 잃지는 않는 사람은
절대로 헤아릴 수가 없지.
그렇지만 대견한 조제는
츠네오를 잃을 것을 알게 되면서,
아니, 잃게 될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서,
호랑이를 보러 갈 수 있게 되면서,
츠네오를 잃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수가 있었지, 대견하고 멋진 조제.
츠네오가 처음 장국 한 모금을 삼킬 때
거짓말처럼 장난처럼 시작되던 그 피아노 소리와
잠든 츠네오 곁에서 중얼거리던 조제 주위를
빛나는 물고기가 눈부시게 헤엄칠 때 들리던 그 음악,
한번쯤은 더 듣고 싶은데.
<너도 다리를 잘라> 무표정하게 말하던 조제와
취직도 츠네오도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면서 정작 울기만 하던 그 여자애,
온전하지도 않은 것이 남들처럼 놀 생각 하지 말라고 고약하게 으름장 놓다
엉엉 우는 조제의 등을 토닥여주던 할머니,
기억에 남을 어떤 인사도 남기지 않고 조제에게서 도망쳐 나와서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엉엉 목을 놓고 울던 츠네오,
모두 한없이 가엾고 착하고 불쌍하고 대견한 사람들.
조제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사강의 이야기처럼
언젠간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그리고 또다시 고독해 지는 거지.
모든 것이 다 그렇듯,
그냥 흘러간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
... 그러니 꼭 그냥 슬픈 사랑얘기이기만 한 건 아니다.
하긴, 그냥 슬픈 사랑얘기라고 해도 그리 나쁘진 않은걸.
("나는 그냥 조개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렇지만 그것도 별로 나쁘지는 않아..." 라고 말할 때의
조제의 그 천진한 <데굴데굴> 발음을 기억해보노라면
그다지 슬프지도 않은 사랑얘기다.
어쩌면 식칼을 품은 채 담요에 파묻혀 유모차를 타던 조제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장을 보러 다니게 된 이야기인지도.
... 환타지도 없고, 비극도 없다.)
2005.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