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되기 이전의 인간들의 삶,
애초의 절실한 관심은 거기에 있었다고
그래서 나에게사회과학적 글쓰기는 결국엔
잘못 끼운 단추와도 같은 것이라고
이제 와서 도로 풀 수 있을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끼울 수 있을 것인지
나에게 그런 여유와 자원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가끔씩은 하곤 한다.
그러니까, 나의 관심이란 건,
차마 <관심>이라고 부르기 주저되는 그 무엇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관한 것이라고
그것이 그 삶이 속한 사회와 결코 무관할 수 없기에
사회과학이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지만 애초에 나는 왜 사회과학의 길로 들어섰느냐고
대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결심한
소설책 나부랭이들이
어쩌면 나에겐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그리고는 계속 주저한다.
내가 결국 나의 전공을 가지고 쓰게 될 논문이란 게
고통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인지
즐거움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인지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知者 라고
이 말을 경구처럼 붙들어두기 시작한 게 얼만데
나는 도무지 즐겁기보단 고통스러운 것들에만 마음이 가서
이래서야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김모 선생은 아마 이해할지 몰라도
조모 선생이 보면 아마 한심해 할 거라고
그래서 이제 와서야 조모 선생이 좋다고.
그러다가는 또
언어라는 게 어쩌다 나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가,란 생각.
서른이 넘어서야
언어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절감하는데
왜 나는 언어가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이십대 내내 내버려두었는지
아니, 내버려두기는커녕
언어를 붙들고 그것이 나의 삶을 지배하게끔
왜 그토록 골몰해 있었는가, 하는 생각.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알리바이.
어느 쪽이든, 무엇이든,
무슨 논문을 쓰든 혹은 논문 따위는 쓰지 않든,
소설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어느 회사엔가 들어가 취직해 밥 먹고 살든
나에겐 알리바이가 필요하단 생각.
어차피 그 중 무엇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중요한 것은 알리바이라는 생각.
어떤 삶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의 근거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는 생각.
... 대학생들 몇 명과 가족사 인터뷰를 하는데,
인터뷰를 몇 번 하고 나니
마주 앉아 몇 마디만 나누어도
그 아이의 할아버지의 직업을 맞출 수 있었다.
헤어지고 돌아서는 길이면
이상하게 가슴이 멍하고
이 이야기들로 쓴 논문이
과연 교수들에게 <좋은 논문>으로 읽힐까 의문이 들었다.
그게 나에게 중요한가, 다시 묻곤 했다.
하지만 실은 지금으로선
다 귀찮기만 할 뿐이라서
다만 나의 방학을 즐기고 싶단 생각.
방학엔 이런 생각을 하다
학기가 시작되면 생각 없이 바빠지기만 할 것이다.